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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2010), 경계 위에 선자, 경계에서 만나다 본문

영 화/한국 영화

의형제(2010), 경계 위에 선자, 경계에서 만나다

유쾌한 인문학 2010. 4. 1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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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한 장훈 감독의 두번째 작품이다.  08년도 당시 추석에 '영화는 영화다'가 개봉했었는데 당시 여친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가서 억지로 봤었던 영화였다.  뭐 보고나니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었다.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괜찮은 감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작품을 보니 가능성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감독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작품도 억지로 끌려가서 보게된 작품이다. 

영화내용은 단 한줄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경계선
경계선이라는 것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하나의 선이다.  선이 그어지면 공간은 이분되면서 소통불가능성이라는 형태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선이 견고하면 견고할 수록 이 불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는 하나의 주체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선을 그을 수도 있으며 개인과 개인사이에서 선을 그어 소통불가능성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더 크게는 국가적 측면에서도 선을 그을 수 있으니 분단국가인 우리는 가상의 선을 하나 그어 놓은채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게 된다. 

간단하게는 하나의 주체의 내부에서 나타나는 경계선에서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간에 나타나는 수많은 경계선이 가지게 되는 의미는 단절 그리고 억압을 의미하게 된다.  소통불가능성을 의도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경계선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공간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게 되고 이러한 현상이 하나의 주체에서 나타나는 경우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하나의 공간에 선을 긋는다 하여 그 하나의 공간이 본래적으로 다른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간 그 자체는 균질하며 원시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는 가상의 선을 하나 그어 그 선의 이쪽과 저쪽이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의 마음에 선을 긋는다 하여 그 주체가 두개로 나뉠 수 없듯이 말이다.  선은 그냥 가상일뿐이다.




경게위에 선 자
하지만 어쨌거나 선은 그어졌고 그 선이 견고하면 할 수록 그 선을 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나게 된다.  선을 넘고자 하는 자들의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양공간에 속해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선위에 서려고하는 자들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탄생하게되고 그들이 바로 극중에서의 송강호와 강동원의 캐릭터이다.  경계위에 선자는 각자의 목적을 가진채 경계 너머의 공간으로 침투하려하게 되고 그곳에서 충돌이 생겨난다.  무엇이 되었건 경계위에 선자가 가지는 목적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애시당초에 경계가 세워진 이유 그 자체가 바로 그것이니깐.   

양공간이 가지는 경계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억압성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데올로기라는 허구의 사조에 의해 균질했던 공간의 이분화에서 억압은 시작된다.  이 세상을 설명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관념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허구성을 가진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었던 본래적 목적의 상실과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자기목적성을 가지게 되면서 나타나는 일련의 현상으로 그 자신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진보 혹은 변증법적 나아감에 대한 자기부정에서 발생하는 허구성이다. 

이러한 허구성은 균일했던 공간에 존재하는 파편화된 주체들의 소통가능성을 막게 되고 이러한 소통불가능성은 급기야 여러개의 경계선을 세우기에 이른다.  시작은 하나의 경계선이었지만 그 경계선 자체가 자기복제하여 두개, 세개, 네개 이상의 경계선으로 분열하여 양공간 내부에서도 또 다른 공간적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가 스스로 존재하고 유지하기 위한 자기 목적성으로의 변질로 인해 생겨나는 안타까운 현상이다.

극중에선 이러한 경계에 선자들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북한에셔 내려온 간첩인 강동원에서 남한에서 국정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송강호 그리고 베트남 처녀들.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거운 짊인 하나의 가치관 그리고 그 가치관을 설정한 이데올로기라는 것에 의해 스스로 경계선에 선자들이다.  정치체제의 대립에 의해서 경계선에 선 두 주인공과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체계에 의해서 스스로 팔려온 베트남 처녀들까지.  결국 경계에 선자들은 사실 어느 공간에서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경계에서 만나다
그런 경계에 선자들이 경계에서 만났다.  서로 다른 가치관에 의해 경계위에 서게 된 자들이지만 경계위에 섬으로 인해 경계위에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은 소통불가능성을 소통가능성으로 바꾸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경계위에 선자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경계는 허구라는 것.  공간은 균질하다는 것.  그 공간속에 살아가는 주체들은 어떠한 교육을 받았건 어떠한 피부색을 가지건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건 결국 균질한 공간속에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라는 허구성이 만들어낸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가치관이 생겨나게 된다.  너와 나는 동일한 공간속에 살아가는 균질한 인간으로서 생겨나는 일종의 가족애이다.  가족애라는 것은 전인류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가치관으로서 그 어떠한 차별적 요소에 의해서도 나눌 수 있는 보편성 그 자체이니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변화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측면 즉 가족 이데올로기로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애의 획득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가족이라는 하나의 가치관의 설정이라기보다는 균질성에 대한 깨달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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