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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일상속의 실재와 환상의 전복 - 시를 중심으로

  평화로운 듯 정적인 공간.  물과 하나 된 죽음이 바람에 떠내려 온다.  그 옆으로 씌어지는 ‘시’라는 단아한 문구와 죽음은 대단히 이질적이다.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이 장면은 이미지로 쓴 시이다.  영화란 어쩌면 커다란 시집일 수도 있겠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각자의 삶들은 나름의 삶과 철학을 담아 하나로 모여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대단히 은유적이고 이러한 은유적 예술은 관객에게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주된 이유는 욕망의 다양성이다.  그 순간 가장 원하는 것에 맞추어 모든 것을 해석하고 바라본다.  욕망은 실재를 숨기고 삶을 환상으로 치장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러한 욕망을 확인 하는 것이며, 영화는 가장 보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결국은 영화는 그 자체로서 환상이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나는 환상적 측면이 강하다고 하여 실재의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순수한 사회체계가 만들어낸 구성된 주체로 본다고 하여 의지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체계 안에서 의지적 자유를 누리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선 틀 자체를 깨어 부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부자유속에서도 은연중에 실재가 예술 속으로 반영되기 마련이며 바로 이러한 측면이 예술의 다양성을 불러온다.  흔히 이창동의 영화를 보고 리얼리즘의 극한이라고 표현한다.  진짜와 같은 착각을 던져줄 정도의 리얼리티는 영화 안에서 전복되어 일상의 환상을 드러낸다.  즉 일상적 모습이 가지는 기만적 요소를 실재의 제시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앞선 작품인 밀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편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연고도 없는 밀양으로 이사 온 신애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강조하고 땅을 보러 다닌다는 식으로 타인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는 허상에 불과하며, 그녀가 보여주는 자기 기만적 행위는 결국 아이를 죽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된다.  밀양이라는 작품은 개인적 측면에서 환상과 실재의 전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환상과 실재의 전복적 성향은 '시'에 들어와서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으로 확장되어 더욱 극단적으로 제시된다.



일상 현실의 기만적 환상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환자들 사이로 핸드폰 소리가 울린다.  전화를 받으려 가방을 뒤져보지만 이내 착각한 사실을 깨닫는다.  옆 사람에게 멋쩍은 듯 웃어보지만 공허한 웃음일 뿐이다.  병원 밖에선 눈은 초점을 잃고 온몸의 감각조차 인식하기 힘든 가슴에 설움의 덩이가 가득 찬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주변엔 호기심 어린 하지만 방관하는 눈빛의 주변인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바라보고 있다.  일상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 도입부는 이창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자화상이다.  사회적 사건과 일상을 이용하는 그의 작품은 영화의 환상적 측면과 상당한 거리를 둔다.  일상 속에 드러나는 흔한 생각과 행동으로 구축된 리얼리티는, 관객에게 실존하는 주체의 허구성을 깨닫게 한다.

  이 영화의 주된 사건은 강간과 자살이다.  가해자 부모들은 최선을 다해 사건을 덮으려고 노력하고 특별한 죄책감을 확인하기 힘들다.  자살한 아이의 사진을 식탁위에 올려놓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웃을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론 분노를 불러오면서 또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즉 일반적 전체로서의 시선은 강간에 대한 분노를 가져오지만 개별적 부모의 시선은 이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 또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할 것 같지만 의외로 단순하고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를 두고 표상과 실재의 대립이라 칭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행위를 관철시킬 때 쉽게 확인된다.  체계 표면적으로는 분명 금하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면 그 금기를 지키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이는 표면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다들 묵시하고 있는 체계의 내면적 실재이며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무지이다. 

  이와 대조적인 부분은 미자가 보여주는 환상적 측면이다.  미자는 끊임없이 시상을 찾아다닌다.  이를 두고 회피적 도망 또는 낭만성에 도취된 행동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리얼리티가 가지고 있는 표상 현실을 전복시키는 하나의 도구적 장치로 보아야 한다.  자신의 손자가 강간을 저질렀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미자는 이야기를 듣다 말고 밖으로 나가 꽃을 관찰한다.  어떻게 보면 심각한 상황 앞에서 시상에 집착하는 어이없는 행동이며 이를 두고 가해자 부모는 개념이 없다고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그 캐릭터가 그 말을 던지는 순간 그것은 미자에 의해 튕겨 되돌아온다.  즉 대책회의에서 행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회의 객관적 상황을 있는 묘사한 리얼리티는 낭만적이면서 환상적인 미자의 행위에 의해 그 허구성이 드러나게 될 뿐이며 이때 표면적 현상과 내면적 실재의 부조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부조화는 표면적 현상을 환상으로 전복 시키게 되고 이로 인해 우리의 일상적 삶은 마치 우리가 환상으로서의 영화를 소비하는 것과 딱히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는 개인의 분열 그리고 각 주체들 간의 소통불가능성을 불러온다.  대부분의 소통들은 내외부적으로 실재를 은폐한 채 표면적 환상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결코 소통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기에 환상성이 강조된 표면적 주체는 그 자체로서 인간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된다. 


본다는 행위의 의미 변화
  시를 배우면서 미자가 익히는 것은 어떤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서 시각의 변화이다.  평생을 두고 사과를 보고 먹어왔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사과를 본적이 없다.  즉 표면적 사과만을 인식했을 뿐 그 사과가 가지고 있는 내면적 실재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고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우리의 일상적 삶이라는 것이다.  미자는 문화원에서 배운 이것을 영화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확인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과 자신의 내면적 실재이다.  새롭게 본다는 행위의 의미는 본질적 실재의 직시이며, 이러한 의미 변화는 플롯 상에서 타인의 욕망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급격히 생겨난다.  변화는 주체에게 커다란 경계선을 그어버리게 되고 과정의 총합인 주체를 전과 후로 나누어 타인의 욕망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는 커다란 변화이기에 내적으로 개인이 가지는 소외와 외적으로 각 주체들 간의 소통불가능성의 의미변화를 가져온다.

  미자는 노래방에서 스스로 말하듯 팔자가 거센 여자이다.  남편은 없고 하나뿐인 딸은 이혼하여 부산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은 손자와 함께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 거주한다.  구체적인 플롯 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녀가 홀로 남게 되는 순간에 확인할 수 있는 텅 빈 눈빛에서 많은 상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상실은 체계의 폭력을 불러 온다.  개인의 상실이 허용되는 범위를 넘어설 때 인과는 생략되고 결과만을 잘못된 것으로 결론 내려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은 각자 만들어낸 환상을 실재로 인식하여 살아간다.  그러한 부분이 멋쟁이 할머니로서의 모습이다.

  항상 웃는 멋쟁이 할머니는 상실을 가릴 수 있는 직접적인 방패가 된다.  이는 마치 밀양에서 신애와 딱히 다를 바 없는 부분이다.  그런 그녀에게 본다는 행위의 의미 변화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경계선의 그어짐을 의미하고, 그 이후 많은 타인의 욕망이 자신에게 투사되면서 인식 전반에 큰 변화가 생겨난다.  변화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몇 살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자신의 첫 번째 기억이다.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 순간을 조용히 회상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고통과 상실의 상징적 질서를 벗어나 언니와의 추억이 담긴 안락함이 있었던 상상적 공간으로의 회귀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볼 대로 맛본 미자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타인의 욕망은 자신의 내면으로 침착해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때 확인 되는 것이 현상과 실재의 거리이다.  그것은 멋쟁이 할머니로서의 현상과 어린 시절을 꿈꾸는 실재가 가지는 거리이다.  이는 알츠하이머병의 확인을 통해서 더욱 크게 부각된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하나하나 잃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변화된 시선이 향한 어린 시절의 실재를 잃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내면의 상실을 의미하게 되고 그 상실은 그만큼의 거리를 담보한다.

  이와 동시에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각 주체들 간의 거리 그 중에서도 손자와 자신의 거리이다.  인간은 결국 개별적 개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기에 본질적으로 소통의 어려움 또는 불가능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손자와 자신의 거리는 영화 속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 딸과의 거리이기도 하다.  말로는 항상 친구 같다고 하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그만큼의 거리.  이는 관계가 가지고 있는 가식적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되며 이 역시 본다는 것의 의미변화가 이끌어낸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듯 시는 수많은 표면적 환상과 욕망의 실재를 제시하고 그 각각을 전복시켜 버린다.  크게 보아서는 영화 전체로 드러나는 리얼리티 그리고 그 내면에 숨겨진 실재의 제시를 통해서 리얼리티가 가지고 있는 기만적 환상을 드러내어 극단적 사실성은 극단적 허구성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허구성의 실체를 이루는 것은 실재적 욕망이다.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욕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이의 죽음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금전관계를 둘러싼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욕망으로 대체되어 소비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죽은 아이의 정면을 응시할 필요가 없고 물에 떠내려갈 때에는 뒷모습만 드러날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팔레스타인 어머니가 울부짖을 때 그 눈물은 소비의 측면으로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실 이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타인의 고통은 나에게서 두세 걸음 떨어져 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평안을 위하여 타인의 고통을 포장하여 소비할 뿐이다.  소비성의 측면이 강화된 행위들이기에 이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기만적 환상이 되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 가지는 경계선
  이 영화에서는 크게 보아 두 가지 경계선이 존재한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본다는 것의 의미변화에 따라 생겨난 개인의 시간적 흐름 속에 그어지는 경계선이다.  그와 동시에 확인되는 또 다른 경계선은 바로 공간위에 존재한다. 공간은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정한 교집합을 가진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각 공간에 존재하는 개체들이 그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벽하게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시모임에서 음담패설을 하는 형사를 보고 미자는 고상한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의 입장에선 괜찮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공간속에서 미자는 타인의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시모임에서는 고상하지만 가해자 모임에서는 사건을 덮기에 급급하며 파출부로 나가는 곳에서는 노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이렇듯 인간은 다양한 공간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 공간 안에서 각각의 욕망이 가지는 시선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인간을 복수적 인간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 공간 내에서 인간이 어떠한 욕망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가? 그것이 바로 각 집단에서 구성된 인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복수적 인간이라기보다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욕망의 다양성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미자는 이러한 공간들 속에서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시 강의에서 각자 아름다웠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던 순간, 임대아파트를 얻었던 순간 심지어 자신의 불륜이야기까지.  다양하게 나열되는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공간을 상정한다.  그 공간들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채워져 있고 그 기억들은 대부분 그 시점에서의 욕망의 투영이다.  아름다운 순간이란 어떻게 보면 그 순간의 가장 간절했던 욕망의 충족일지도 모르겠다.  


  미자는 아이가 자살한 다리로 간다.  꽤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인데 영화 속에서는 그다지 아름답게 그려지진 않는다.  인위적으로 이미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그 자체로서 허구이다.  이는 흔한 경험인데 인위적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그 광경을 직접 보기 위해 그곳에 가보면 절대로 그 사진이 제시하는 이미지를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이창동의 영화는 이미지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아무런 색체가 부여되지 않은 이미지가 제시하는 느낌은 모노톤.  가치가 완전하게 배제되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다리 위에 홀로 선 미자는 모자를 강으로 떨어뜨리게 되고 이에 다리 밑으로 내려간다.  강변에서 그녀는 다리를 올려다보며 그때 떠오른 시상을 메모하기 위해 돌 위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그 순간 그 하얀 노트위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백지 위에 자신이 발견한 또 다른 무엇의 봄을 적으려 할 때 비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한 방울 한 방울 노트를 적셔나간다.  모노톤으로 제시된 이미지 위에 그려지는 이 장면은 마치 중요한 제의를 맞이하는 것 같다.  비는 상당히 많이 오고 미자는 온몸으로 비를 맞이하는데 그때 미자는 무언가를 씻겨 내려 보내게 된다.  흔한 의미처럼 더러운 것을 씻겨 내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자존을 씻겨 내리는 것이다.  비를 통해 비워낸 그녀는 타인의 욕망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텅 빈 눈동자를 한 채 만들어진 그 공간의 왜곡은 손자의 욕망이 수많은 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왜곡된 욕망은 서로 작용하여 이렇듯 미자를 갉아먹어 들어간다.


  이러한 공간과 욕망의 측면은 극중 피해자의 어머니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자가 피해자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그 집은 비어있는 공간이다.  강아지만 홀로 지키고 있는 그 집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빼앗긴 사라진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공간은 기억을 담고 있기에 벽에 걸린 사진들이 그 공간의 추억을 이야기 해주지만, 그것은 강탈당한 것이기에 상처 입은 흔적으로 남게 된다.  결국 타인의 욕망이 그녀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기억을 채워나갈 수 있는 공간이 가진 가능성 그 자체이다.  그것을 빼앗겼기에 텅 빈 집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채울 수 없는 공간은 그 어떤 리얼리티 앞에서도 가식적 환상일 뿐이다. 


  피해자의 어머니를 찾아 밭으로 향하는 미자는 살구를 통해 시상을 얻는다.  자신을 버려 깨지고 밟혀 다음 생을 준비하는 살구의 모습.  다시 보게 된 살구의 본질을 통해서 왜곡된 욕망의 갉아먹음이 채워지는 듯하다.  살구와 함께 만연한 꽃들은 상처 입은 자신에게   살구의 모습을 통해 자신도 다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미자는 이러한 착각 속에서 채워짐의 환희를 농부와 나누려 시도하지만 뒤늦게 다가오는 사실은 그 농부 여인이 죽은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미자와 피해자의 어머니가 가지는 위치는 동일하다.  동일한 타인의 욕망에 의하여 강제로 경계가 그어지게 되고 공간을 강탈당한다.  그 강탈의 과정은 조금 다를지언정 그것의 원인은 동일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느끼는 살구의 본질을 피해자의 어머니에게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도 살구의 실질을 받아들여 다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자는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시의 죽음
  타인의 욕망이 만들어낸 작용은 이렇듯 간단하지가 않다.  욕망이 만들어낸 폭력은 미자로 하여금 자존의 상실까지 불러오지만 그와 동시에 확인된 스스로의 욕망 역시 포기할 수 없다.  시를 쓰며 살아보려 하지만 손자의 그릇된 욕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공간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시 모임 회식자리에서 선생님과 젊은 시인은 시의 죽음을 말하게 된다.  시의 죽음은 곧 본다는 행위의 의미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는 곧 상징적 인간이 그 상징질서 안에 완벽하게 포획 당한 채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본질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힘의 상실을 의미한다.  시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모임에서 불러지는 이태리 가곡은 대단히 가식적이고 허상으로 느껴지게 한다.  즉 시모임 자체가 기만적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 환상을 유지하고 싶었던 미자는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형사가 마음에 안 들지만 그 형사야 말로 기만적 환상 속에서 가장 실재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상징 질서에 포획되지 않은 채 순수한 내면에 집중하고 실현하는 인물은 오직 그뿐이다.

  미자는 자신이 확인한 욕망을 충실히 이행하여 손자를 돈 오백만원에 구하게 된다.  하지만 죽은 아이의 사진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동네아이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훌라후프를 돌리며 일상을 지내는 손자를 통해서는 피해자 어머니가 가진 공간의 상실을 채울 수가 없다.  그녀가 받아들인 삼천만원이라는 돈은 상징 질서가 그녀에게 강요한 또 다른 폭력이다.  그 돈을 받아들임으로 그녀는 물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되 그녀의 자존을 유지하던 남은 공간마저 강탈당하게 된다.  이렇듯 욕망이 만들어낸 작용은 단순하지가 않다.  질서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보여주는 폭력은 자의와 관계없이 지독하게 잔인하기만 하고 시가 죽어버린 세상에서 타자의 시선의 변화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욕망의 작용 뒤에 남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닌 무채색의 무지이다.  이러한 무지는 총체적 인간 소외에서 비롯된다.  내부적으로 내면적 본질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점차 사라지면서 지극히 단순하고 편면적인 욕망만을 추구할 뿐이며 이는 개인의 소외를 가져온다.  그와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타인과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을 직시하려는 시도가 점차 사라지면서 관계의 소외를 불러온다.  이러한 무관심과 무지의 체계가 만들어낸 소통불가능성 안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구원은 결국 본다는 행위의 본질에서 도출된다.  나의 내면을 바라보고 안에서 만들어지는 욕망의 실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그것에서 진정한 구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나가는 말
   이 작품은 상당히 정적인 영화이다.  2시간 15분 가까이 되는 긴 러닝타임.  아주 긴 호흡으로 이어져 나간다.  어떻게 보면 시상을 찾는 여행에서 비롯된 자존의 확인으로서 상당히 아름다운 영화로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들어나는 수많은 욕망들은 미자가 발견해내는 시상처럼 아름답지 않다.  시라는 매개체를 전면에 내세운 욕망의 확인으로서의 영화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러한 다양한 욕망들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은 관객에게 상황을 던지기만 할뿐이다.  상황들도 아주 단선적이다.  관객에 따라선 지루함을 강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서사적으로 완전하게 연결되지 않는 느낌은 관객으로 하여금 미자의 행동들에 의문을 품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 있어서 서사를 넘어서는 요소는 바로 이미지 그 자체이다.  영화의 본질은 이미지들의 연속체라는 것이고 그 이미지가 담고 있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 숨 쉬는 인간의 행동에서 의외로 많은 부분이 도출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미자를 연기한 윤정희의 눈빛이다.  왜 미자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서사적으로 생략되어 정확히 이해가 안가지만 눈빛에서 정당성이 부여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렇다고 카메라가 그녀를 가깝게 잡아 눈빛을 부각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 미자가 혼자 있는 순간들은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도리어 물리적으로 떨어진 채 그녀의 전체를 바라보듯이 잡아내게 된다.  이러한 물리적 거리는 카메라 렌즈에 관객을 위치시켜 미자와 관객들이 가지는 거리만큼을 상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관객은 마치 영화 속 타자의 위치에 자리매김하여 미자가 문화원을 다니는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만큼 떨어진 채 바라보게 된다.  이때 영화는 스크린을 벗어나 스크린 밖 좌석으로 확장한다.  즉 영화 속 수많은 타인들이 던지는 시선은 관객이 좌석에서 앉아서 바라보는 시선과 동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객이 영화의 일부분이 되고 살짝 거리를 둔 채 미자를 바라보는 것은 결국 서론에서 말한 영화를 소비한다는 행위가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플롯은 분명 영화의 소비적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일정한 거리를 가진 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팔레스타인 어머니의 눈물을 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형태의 소비성의 측면을 그대로 유지시켜 나감으로써 이 작품은 영화 플롯 외적으로 더욱 확장된 리얼리티를 확보하게 된다.


  오늘날 영화는 환상과 소비로서의 성격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팝콘을 위한 시간 때우기로 전락해버린 것이 작금의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시의 죽음이 과연 영화 속의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것일까?  도리어 이창동 감독은 시의 죽음을 통해 영화의 죽음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이는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과 교양이 죽어버린 현시대에서 문화 전반으로 확인 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와 소비의 측면에서만 판단해버리는 상황 속에서 좋은 울림을 가진 작품을 지속적으로 내놓는 예술가들의 활동은 인간을 극단적인 소외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주게 된다.  좋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 시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다는 행위의 시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렇게 변화된 시선은 상징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체로 하여금 타인의 욕망을 좀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하여 그 작용에서 비롯되는 나의 본질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게 하는 힘을 주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통에 대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는 외침에 불과한데 이는 나의 본질을 직시하려는 시각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결국 소통이란 나의 본질을 정확히 노려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말이다. 



ps.  도움주신 세실님, 사라뽀님, 리나옹에게 감사의 말을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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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알파

    | 2010.12.30 07:04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음.. 정적인 영화는 그 안에 감정과 느낌을 어떻게 살리냐가 관건인데..^^ 궁금해지는 영화네요~!

  2.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7 신고 | PERMALINK | EDIT |

    보시지요!!

  3. | 2010.12.30 07:19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4.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7 신고 | PERMALINK | EDIT |

    네 2011년 화이팅!!

  5. | 2010.12.30 07:23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6.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7 신고 | PERMALINK | EDIT |

    전 지금 부산이라..ㅋㅋㅋ

  7. 책과 핸드폰

    | 2010.12.30 08:53 | PERMALINK | EDIT | REPLY |

    흥미진지한 글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8.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8 신고 | PERMALINK | EDIT |

    감사합니다.

  9. 카타리나^^

    | 2010.12.30 09:01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오호...역시....역시...........어려워 ㅜㅜ
    그대는 좀 쉽게 쓰란 말얏
    나같이 무식한 사람은 이해가 안오잖아...췟! ㅋㅋㅋㅋㅋㅋ

    그대에게 합격의 영광이 있기를....아멘 아멘!

  10.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8 신고 | PERMALINK | EDIT |

    아멘 아멘!!!

  11. 미디어세터

    | 2010.12.30 10:00 | PERMALINK | EDIT | REPLY |

    정말 정말 동감이에요.
    글 정말 잘쓰시네요.

  12.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8 신고 | PERMALINK | EDIT |

    감사합니다.

  13. 최정

    | 2010.12.30 11:09 | PERMALINK | EDIT | REPLY |

    참 저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또 반성하게 만드는 용짱님이십니다/

  14.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8 신고 | PERMALINK | EDIT |

    뭐 굳이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15. | 2010.12.30 13:16 | PERMALINK | EDIT | REPLY |

    이 씨~

  16. | 2010.12.30 15:08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17.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8 신고 | PERMALINK | EDIT |

    네네 내년에도 즐거운 시간 보내보아요!!

  18. DDing

    | 2010.12.30 20:04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음 역시 어려워요. 용짱님은 다음뷰에서 불가해한 존재 넘버원입니다. 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미리 인사 드리고 갑니다.
    한 해 동안 제 정신세계를 압박했던 글들 레알 감사드립니다. ㅋ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

  19.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0 19:18 신고 | PERMALINK | EDIT |

    ㅎㅎㅎㅎㅎㅎ

    요즘 제가 사정이 상당히 바빠서..

    댓글도 잘 못남기고 그렇네요.

    해피한 2011년 되어보아요.

  20. mami5

    | 2010.12.30 21:32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용짱님 연말도 하루 남았네요..^^
    새해도 좋은 일 가득하시길요..^^

  21.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1 21:09 신고 | PERMALINK | EDIT |

    마미님 알라븅..

  22. | 2010.12.31 07:59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23.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12.31 21:09 신고 | PERMALINK | EDIT |

    우오... 이거 좀 짱인가요 ㅋㅋㅋ

    이거 영화 한 15번 정도 봤을꺼에요..
    아 진짜 토쏠리게 봤어요.

    첨에 써놓은거..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치고..

    정말 죽도록 고쳤더래죠.

  24. 코코찌니

    | 2011.01.02 19:09 | PERMALINK | EDIT | REPLY |

    저도 개인적이지만 이창동감독을 무지 좋아하고 그의작품이라면
    다 보았지만...
    이렇게 디테일한 영화평은 처음입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면서 진작에 이블방을 알지 못한 제우둔함을
    꾸짓고 싶어지는데요.^^;;;;
    시란...이시대가 주는 마지막 언어가 되질 않기를 바라는 일인으로써...
    멋진 평론 감동스럽게 읽고갑니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 꾸벅~*^^*

  25. ^^

    | 2011.04.21 02:55 | PERMALINK | EDIT | REPLY |

    영화보다 어려운 리뷰네요
    이정도로 철학적인 영화인줄은 몰랐습니다.
    여백이 많은 영화이고 그 여백에 숨어있는
    많은 의미들을 알아차리지못한것은 저의 무식탓인듯...
    잘읽고갑니다.

  26. Brucy

    | 2011.06.21 13:55 | PERMALINK | EDIT | REPLY |

    리뷰 잘 읽었습니다. 3번 정도의 위기가 왔는데- 그래도 끝까지 읽었습니다.
    사실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요.
    그래도 리뷰중에 제일 와 닿는 글귀가 있었는데요..

    "고통은 나에게서 두세 걸음 떨어져 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평안을 위하여 타인의 고통을 포장하여 소비할 뿐이다."

    진실로 고통을 스스로 당하지 않고서는 그 아픔의 깊이를 어떻게 가늠하고 느낄 수 가 있겠습니까.. 그저 고통을 바라볼때 고통을 당한 이에 대한 연민 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그칠 수 밖에 없는거죠.

    이렇듯 늘 있어왔던 그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익숙한게 아닐까 생각 해봅니다. 그러다 자의든 타이든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마치 큰일이 날 것 처럼....겁을 먹을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인 것 같습니다.

    일상속에서 익숙해진 것들에 대하여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간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힘을 키워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리뷰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세요.

  27. ...

    | 2015.03.30 16:38 | PERMALINK | EDIT | REPLY |

    어제 ebs에서 본 영환데, 인간 그리고 인간성상실에서 오는 현대인의 메마른정서를 보여 주며 생각 할거리를 준 영화라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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