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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우(2004), 윤리적 절대주의와 그 문제점 본문
쏘우
한국에는 2005년도에 개봉한 영화인데 개봉 당시에 상당한 충격을 준 영화였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들을 가둬놓고 잔인한 게임을 유도하는 직쏘라는 캐릭터가 주는 강한 매력은 쏘우를 6편에 달하는 쏘우 시리즈를 양산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러한 양산형은 언제나 그렇듯 그다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못한다. 비슷한 예로 큐브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두작품 모두 최고의 저예산 1편과 양상형 후속작들로 나뉘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사실 이런 영화를 두고 이런 저런 평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굉장히 싫어하던데 결국은 하던 말던 내마음인 것이고 객관주의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좋은 영화도 없는 것 같다.
흔히 절대주의 또는 객관주의라고 칭해지는 윤리적 태도는 비슷해보이지만 약간 다른 태도이다. 이 둘의 구분이 필요한데 절대주의는 최고의 도덕원리가 존재하며 모든 사람은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예외도 없다는 태도이며, 객관주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원리라는 측면에서 절대주의와 같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절대주의자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고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
중세에 인간을 지배하던 원칙은 신과 자연법이다. 신이 창조한 세상 모든 만물은 신이 창조할 당시에 부여한 나름의 목표가 있으며 만물은 그 신의 섭리에 따라서 그 존재 의미를 찾아가게 되며 이러한 신의 섭리는 신의 지혜로서 영원법이라 칭하며 신에 의해 창조된 만물은 영원법 종속된다. 신의 창조원리에서 인간은 약간 독틀한 지위를 가지게 되는데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 역시 신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이기에 창세 당시에 신이 부여한 소명과 전우주적 신적 섭리에 의해 종속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신의 창조물이기에 이러한 신의 창조 의지와 영원법에 따르게 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즉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측면에 의해 수동적인 입장이 아닌 능동적인 입장에서 영원법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듯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활용하여 능동적인 측면에서 신의 의지에 참여하여 일정한 규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자연법이다. 이러한 자연법은 인간 이성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보편 타당한 도덕법으로 아퀴나스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사고관이다. 반면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실정법은 각기 다른 사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으며 실정법은 자연법에 근거를 두게 된다. 정리하자면 영원법 - 자연법 - 실정법의 순으로 논리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에 의해서 발견하는 자연법에는 크게 보아 세가지 핵심적 사고관이 존재한다. 첫째는 인간 본성이다. 인간 본성은 결정되어진 것으로서 신에 의해 부여된 목적을 따르도록 운명지어지게 된다. 이러한 인간 본성은 크게 보아 세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인간은 하나의 개체적 존재로서 자기를 보존하려는 본성이다. ② 하나의 동물로서 동물이 가지는 공통적 경향 예컨대 성욕, 수면욕, 식욕 따위의 본성을 가진다. ③ 인간은 이성을 부여 받은 존재로서 이성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본성도 가지게 된다. 자연법이 가지는 두번째 특징은 이성이다. 신의 지혜인 영원법이 인간에게 작용한 결과 인간은 이성이라는 자연의 빛을 부여받게 된다. 동물은 이성이 없기에 영원법에 따르는 것이 필연적이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연법을 이해하고 자연법을 각각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신은 인간에게 이성을 부여함으로써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능동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하였고 이에 자연법을 따르고 추구하여 신의 의지를 완성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게 된다. 자연법의 세번째 특징은 의지이다. 인간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존재이다. 이에 인간에게는 어느정도의 자율성이 부여되고 이 자율성에 따라 인간은 도덕적 주체가 된다. 더욱이 이 세상은 신이 만든 세상이기에 만물은 신의 의지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성을 가진 인간은 신의 의지에 참여하여 도덕적 주체로 설 수 있게 된다. 결국 정리하자면 실정법은 그 근거를 자연법을 찾곤 하지만 자연법은 그 근거를 신의 의지에서 찾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중결과의 원리
위의 자연법의 원리 안에서 이중 결과의 원리를 통해 행위의 옳고 그름에 있어서 절대성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신에 의해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합리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자연법은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을 가지기에 부적절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에 아퀴나스는 예외가 없는 이론을 이성을 통해 정립함으로써 도덕적 딜레마가 발생한 상황에서도 옳은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이중 결과의 원리란 하나의 행동이 가져오는 딜레마적인 두가지 결과에 대한 절차적 이론이다.
조건1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이거나 도덕과 무관한 중립인 행위이어야 한다.
조건2 나쁜 결과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이어서는 안된다.
조건3 행위자의 의도가 나쁜결과가 아닌 좋은 결과에 있어야 한다.
조건4 나쁜 결과가 허용되는 경우 불가피한 중대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중결과의 원리 하에서 직쏘의 행동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조건1을 충족하지 못하고 조건2 역시 충족하지 못한다. 조건3은 예컨대 한 사람을 죽이면 세상이 구원되고 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했을때 그 사람을 죽인다면 그 나쁜 결과는 의도된 것이기에 허용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보면 나름대로 직쏘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들에게 죽음의 게임을 유도하곤 하지만 결국 그 명분 역시 조건3을 충족할 수 없기에 허용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결과의 원리는 여러가지 문제점도 가지게 된다. 첫째로 행위자가 명확히 의도를 가진채 행한 행위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문제이다. 예컨대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를 운전하는 운전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대로 직진을 하면 5명을 치여 죽이게 되겠지만 옆으로 꺽으면 1명이 죽는 상황이다. 이때 공리주의자들은 당연히 꺽는 것을 주장하겠지만 이중결과의 원리에 의하면 그대로 직진을 해야 한다. 조건2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행위자가 옆으로 꺽는 행위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도에 있지 않았기에 조건3이 위반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다. 하지만 과연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가 그러한 의도와 무관하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두번째로는 기술의 문제가 있다. 의도된 도둑질을 행하면서 기술하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원했다는 식으로 재기술 할 수 있는 문제가 존재한다. 세번째는 넓게 보아 절대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인데 인간 본성을 목적론적으로 바라보아 신으로 부여받은 계획에 따라 운명주어졌다고 바라본다면 자연스럽게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 된다. 이러한 관점 하에선 인간에게 부여된 목적으로서의 출산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동성애는 그른 것이 된다.
절대주의
절대주의적 윤리관은 크게봐서 절대주의와 보편주의 두가지로 나뉠 수 있다. 절대주의에 따르면 절대적이라고 하는 규범은 그 어떤 예외도 갖지 않는다. 예컨대 약속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된다는 규범이 있다면 사람을 살해하기로 한 약속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반면 보편주의는 절대주의와는 달리 보편적인 규범을 받아들이되 예외를 인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지 말라는 명제는 절대주의와 보편주의 양자 모두에 타당하며 선한 행동이 된다. 하지만 강도가 들어 우리 가족을 죽이기 직전까지 갔을때 가족을 구하기 위해 강도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절대주의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비윤리적인 행동이 된다. 그 어떤 예외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주의의 입장에서는 이는 허용이 가능하다. 보편주의의 입장에서 예외를 허용하는 이유는 예외들 그 자체에 보편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당방어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인을 하지 말라'라고 했을때 이렇게 서술된 규칙은 예외를 포함하게 된다. 결국 정당화하는 상황조차도 미리 규정한채 모든 인간에게 보편성을 부여한다면 이는 보편주의자가 된다. 보편주의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을 놓고 그위에 규범을 정초시키는 체계이다. 만약 모든 예외적 상황을 완벽하게 그 어떤 예측불가능한 예외도 없도록 예상하여 규칙을 정한다면 이는 절대주의 및 보편주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주의는 윤리적 상황주의로 바라볼 수도 있다. 상대주의와 비슷하게 보여 착각하기도 하는데 윤리적 상황주의는 객관적인 도덕원리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된다는 태도이다. 즉 하나의 목적이 부여되었을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다른 수단이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상위의 보편적 목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신에 의해 주어진 의무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있다. 안식일에는 그 어떤 노동도 행해져서는 안되며 신에게 경배하는 시간으로 오롯이 돌려져야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밥먹이기 위해 안식일에 노동을 하여 의무를 행하지 않은 적이 있다. 이에 사제들이 예수에게 비난을 가하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게 된다. 안식일의 목적은 인간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것에 있으며 그에 대한 감사로서 신에게 경배를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에 제자들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안식일에 노동을 하는 자신의 행위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직쏘
직쏘가 이러한 죽음의 게임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암에서 기반한다. 암에 걸린 자신에게 절망의 말만 던져준 의사와 만나고 일련의 과정 속에서로 자살을 결심하게 되지만 운좋게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살아남아도 자신의 몸은 쇠파이프가 관통하는 등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이를 살고자 하는 의지로서 홀로 처치를 하게 된다. 그때 그는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이 보여준 정도의 생존 본능이 있는 사람만이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나름의 논리를 세우게 되고 이에 소중한 삶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사람들을 선별하여 죽음의 게임을 하게 된다. 죽음의 게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강인한 생존 본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는 잔인하게 죽게 된다.
이러한 직쏘의 행위는 결국 똑바로 살아라라는 목적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퀴나스의 이중결과의 원리를 통해 본다면 일단 사람을 납치해 죽이려든다는 측면에서 조건1을 충족하지 못한다. 조건2 역시 좋은 결과를 위해 나쁜 결과를 이용하는 것임으로 충족하지 못하며, 직쏘의 행위 자체가 나쁜 결과를 의도하고 있기에 조건3도 만족하지 못한다. 보편주의에 따르더라도 직쏘의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 엽기적인 살인을 통해 사회 전체에 삶에 대해 환기를 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살인을 선택하는 것이 예외적 상황으로 허용된다고 보기 위해선, 직쏘가 내세우는 목적과 피해자의 생명이 아퀴나스의 조건4 비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꼭 저런 죽음의 게임을 통해서만 목적을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영화속에서는 아만다라는 여자가 직쏘에게 잡혀서 탈출한 이후 그의 제자가 되는데 직쏘의 천박한 논리에 감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절대주의라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든 사회 및 개인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윤리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이를 통해 직쏘를 설득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보편적 윤리라는 것으로서 설득이 안되는 사회나 개인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러한 보편적 윤리에 대해서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되려 우리는 직쏘가 왜 저렇게 되어버렸는가?에 대해서 다른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직쏘가 내세우는 명분은 라깡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회안에서 자신의 정립된 주체가 완벽하게 붕괴되는 경험에서 오는 원시적 공격성의 외부적 돌림에 다름 아니다. 자아 형성 이전의 단계 즉 거울 단계의 진입 이전의 아기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는 현실 안에서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 즉 환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인간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고통이다. 거울단계를 거치게 되면 초기에 가졌던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공격성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추방 또는 억압되게 된다. 이러한 매료와 소외의 사이에서 지독한 나르시즘이 발생하게 된다. 즉 나르시즘은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이라 볼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자신의 이미지를 통한 자기 도취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다시 억압된 무의식의 자신의 신체에 대한 파편화된 소외가 떠오르며 자신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억압으로서의 공격성이고 이것이 신체훼손이라는 독특한 공격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주체성의 완전한 붕괴에서 오는 행동은 진단되어야할 무엇이지 보편적 윤리성이 의심되어야하는 상황은 아니다. 따라서 아만다의 행위 역시 공감할 수 없는 되려 자신의 주체적 붕괴를 직쏘를 통해 재확인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마무리
굉장히 잔인한 영화이긴 하지만 저예산 영화로서 획기적인 면을 선보인 굉장히 독특한 공포영화라고 볼 수 있다. 윤리적인 측면에 집중해서 바라보긴 했지만 직쏘라는 개인의 주체적인 측면과 영화속 피해자들의 주체성의 측면에서 바라보더라도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사실상 이 작품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아쉬운점이 있다면 영화속 피해자들의 평소의 삶을 너무 적나라게 그려내서 여실히 드러나버린다는 정도랄까?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직설적인 성격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의식과 잘 맞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꽤나 괜찮은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