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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1999년에 나온 한국형 잠수함 영화이다.  한국영화에서 잠수함이 등장한건 이영화가 최초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하진 않다.  아무튼 당시 이 영화는 망한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이 영화는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당시에도 너무 지나친 내셔널리즘의 부각으로 그다지 별로였었는데 다시보니 손발이 오그라들정도로 지나친 양상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잠수함과 이데올로기
잠수함을 가지고 이데올로기를 그려내는 영화적 시도는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는 내셔널리즘으로 한일대립이 중심에 서게 된다.  물론 갈등요소는 함내에서만 이루어지지만 말이다.  잠수함이라는 장치를 가지고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것은 잠수함이라는 기계적 외피를 이용하여 자신을 둘러싼 바다와 완벽하게 분리되어 그속에서 살아숨쉬는 완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섬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내어 거대한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인간의 삶을 설명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윤택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서 인간을 구속하게 되고 그 구속성은 대단히 폐쇄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우리는 바다와 잠수함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잠수함 너머에 존재하는 바다 전체가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져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바다는 그 어떤 성향도 나타내지 않는 텅빈 공간일뿐이다.  다만 인간이 그 텅빈 공간에서 하나의 공간을 창출해내 그 속에서 자신을 가둔채 살아가는 것에 다름아니다.  마치 잠수함처럼 말이다.  이러한 잠수함이라는 섬은 잠수함이 가지고 있는 외피라는 경계에서 발생하는 철저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단순한 도식은 잠수함 내부의 사람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인간으로 길러내게 되고 그러한 길러진 인간들로 잠수함이 채워지면서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살아숨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잠수함 너머의 공간은 그냥 텅빈 공간일 뿐이다.  


존재치 않는 개인과 잠수함내의 갈등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개인의 무존재라는 측면이다.  유령의 승무원은 존재치 않는 사람들이다.  극중 주인공인 정우성도 미국과의 연합 훈련도중 갑자기 미쳐버린 함장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를 살해하게 되어 사형을 언도받아 죽게 되는데 그런 그를 다시 살려내어 유령에 탑승시키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승무원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서 지워버린 후 유령에 탑승시켰을 것이다.  잠수함이라는 것이 외부와 격리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섬과 같은 존재라면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어떠한 존재일까?  잠수함 내에 존재하는 인간이 그 잠수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데올로기적 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그 섬이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길들여지고 그것에 의해 가치관이 설정되게 된다.  

중요한건 그 정도인데 보통 사회에서는 그 가치관의 지배를 받되 그 정도가 어느 정도 완화되어 나타나게 되지만 극중 잠수함 내부의 승무원들은 그 정도가 극대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즉 일가치관에 완벽하게 지배되어 나타나게 되는바 이러한 일가치적 지배현상으로 인해 개인의 주체가 완벽하게 사라지는 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화속에서는 승무원들의 무존재로서 표현되는 것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보자면 2차대전 당시의 일본과 독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미친 집단이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는가를 잘보여준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고 우리는 그 직접적 피해자이기에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미친 이데올로기의 지배에 저항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영화에서 잠수함 내의 갈등이라는 측면으로 표현된다.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광기에 미친 최민수와 합리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 정우성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목적론과 의무론 그리고 공리주의
대주제에 대해선 위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보았고 소주제로 가보자면 역시 핵무장과 관련된 윤리성이 문제가 된다.  윤리학은 크게봐서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의무론은 행위 그 자체가 가지는 도덕적 특성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대표적으로 칸트의 이론을 들 수 있다.  목적론은 결과론적인 특징을 가지며 결과(목적)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결과주의 윤리라고도 한다.  이러한 목적론은 공리주의가 가장 대표적이며 그외 이기주의도 목적론의 한 유형이다.  

공리주의의 씨앗은 에피쿠로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옳고 그른 행위란 쾌락과 고통에 따라서 결정되고 에피쿠로스의 이론은 철저히 개인의 측면에서 발현된다.  따라서 이는 윤리적 이기주의의 영역이다.  공리주의는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하게 된다.  즉 개인이 아닌 사회 전반으로 확장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크게 봐서 네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기준을 어디에다가 두느냐에 따라서 나눠지는 식이다.  나눠진다고 해서 공리주의가 가지는 최대의 이점인 최대다수 최대행복 자체가 바뀌진 않는다.  

  
양적 공리주의와 질적 공리주의
첫째는 벤담과 밀의 양적 공리주의와 질적 공리주의이다.  이것은 목적(결과)에 대한 차이이다.  공리주의라는 것 자체가 경제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행위를 함에 있어 애매한 윤리적 선택의 상황에 직면했을때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계산을 하여 쾌락이 크면 클 수록 옳바른 행위라고 판단하게 된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는 쾌락주의 원리라고도 불리며 결과가 좋으면 수단은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각각의 개인은 윤리적 선택의 상황에서 쾌락을 양을 계산하여 선택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벤담은 쾌락 계산법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즉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다산성, 순수성, 파급범위를 종합하여 쾌락의 점수를 매기는 식이다.  이러한 양적 공리주의는 아주 저급한 형태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는데 쾌락의 점수를 매긴다는 사고 방식 자체가 너무 가변적이고 너무 인간의 삶을 단순화시켜 바라본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더욱이 벤담에 의하면 예컨대 영화 매트릭스의 상황도 정당화될 수 있다.  그것이 만약 실제세계보다 더 행복하며 쾌락이 크다면 정당화될테니 말이다.  결국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단 배부른 돼지가 훨씬 낫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 양적 공리주의이다.

이러한 벤담의 난점을 제거하기 위해 밀은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밀에게 있어 행복이란 최소한의 고통을 의미하며 쾌락에는 그 수준이 높은 것이 존재한다.  사실 저급한 형태의 쾌락 예컨대 식욕이나 성욕 등은 그것의 지나친 추구로 인해 되려 고통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식욕의 지나친 추구는 비만이라는 고통을 가져올테고 성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정신을 공허하게 만들뿐이다.  이에 밀은 쾌락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질의 상하급으로 나뉜다고 말하며 저급 쾌락보다는 고급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문화나 예술, 지식, 자유 따위에 대한 쾌락이 성욕, 식욕, 수면욕 따위의 쾌락보다는 상위에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것에 대한 추구를 통해 양적 공리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은 존재한다.  공리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객관성에 존재한다.  깔끔하게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장점인데 질적 공리주의에서는 이것이 굉장히 모호해진다.  영화를 보는 쾌락과 그림을 그리는 쾌락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 쾌락일까?  이것이 질적 공리주의의 한계이다.  


행위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 
두번째 기준으로 나눠지는 공리주의는 행위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이다.  위으 경우가 목적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행위과 규칙은 적용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떠한 판단 기준을 내세울 것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적 공리주의 및 질적 공리주의에는 각각 행위공리주의 또는 규칙 공리주의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총 4가지의 조합이 가능할 것이다.  

행위 공리주의란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오는 경우 그것은 옳다고 본다.  행위 공리주의는 일반성을 가진 규칙이라기 보다는 각각의 개별적 상황속에서 더 큰 이익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각기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 라고 했을때 이는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는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오기에 타당한 것이다.  다들 거짓말만 한다면 이익보단 손해가 더 클테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상황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득이 되는 상황도 존재한다.  테러리스트가 나에게 협박을 하며 어떤 정보를 얻어내려고 할때 그 정보를 준다면 수백만명이 죽는 상황이라면 거짓말이 더 큰 이익을 가져오기에 정당화된다.  결국 행위 공리주의란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속에서 각각의 행위에 대한 기준만 제시해줄 뿐이며 각각의 상황에서 행위자는 항상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야 한다.  이러한 행위 공리주의는 더 큰 난점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컨대 부모님이 큰 병에 걸렸다고 해보자.  우리는 보통 부모님의 치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행위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부모님의 치료가 큰 이익이 되지 않고 되려 부모님의 죽음이 이익이 된다면 과감하게 부모님을 죽이라고 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리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례중 하나로서 이러한 측면이 행위 공리주의가 가지는 한계점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규칙 공리주의이다.  규칙 공리주의란 사회적으로 더 큰 공리를 산출하는 규칙을 정해놓고 어떤 상황 속에서 그 규칙에 속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옳다는 식이다.  사실 행위 공리주의처럼 각 개인이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항상 계산을 해야할 필요는 없다.  아주 대표적이면서 공리가 크다고 사회적인 합의가 있는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에 따라 행위 하는게 더 합리적이다.  위에서 본 거짓말 예시를 보자.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규칙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따른다.  하지만 일차 규칙이 충돌을 하는 경우는 중대한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더 큰 공리를 따른다는 규칙을 둘 수 있을테고 이에 테러리스트에게 협박당하는 경우 우린느 중대한 가치를 위해 즉각적으로 거짓말을 행할 수 있다.  이러한 규칙은 의무론의 태도를 일부 따와 최상위의 규칙 즉 최종 규칙을 설정하고 하위의 규칙은 최종 규칙에 따라서 판단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핵미사일과 윤리의 문제
영화적 상황은 아주 단순하다.  한국이 주변 강대국들 몰래 핵탄두가 장착된 핵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해야하기에 이 핵잠의 승무원들은 사회적으로 존재가 지워진채 승선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핵잠의 보유가 부담스러웠는지 자폭을 명하게 되고 이에 최민수는 반란을 일으켜 핵잠을 장악하고 일본의 주요도시를 향해  핵미사일을 날리려고 하고 정우성은 이를 막으려 든다.  이러한 최민수의 행동은 사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하기 힘들 것이다.  영화 자체도 잘 만든 영화는 아닌지라 최민수가 저러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하고 말이다.  

최민수의 논지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강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강함을 이용해 민족의 정기와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사실 국가와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과 러시아는 핵을 보유하고 있고 영화상 일본도 잠재적 핵을 보유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우리가 비록 비밀이긴 하지만 이미 보유한 핵을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손해가 훨씬 더 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관점을 넓혀서 외교와 경제의 문제라는 측면까지 끌어온다면 어떤 것이 더 큰 공리를 가져올지 사실 쉽게 계산이 안된다.  행위 공리주의의 문제점처럼 개인에게 맡겨진 이 계산이라는 것이 이런 초거대한 상황 속에서는 굉장히 불가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어떤식으로 일이 진행이 되버릴지 너무 많은 시나리오가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뭔가 다른 권위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바 그것이 바로 최민수가 끌어오는 국가와 민족의 정기라는 권위이다.  공리를 통해서 설득이 안되니 권위에 의존하여 설득을 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측면은 조리장 시퀀스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함장이 가지고 있던 핵미사일 열쇠를 정우성이 맡게 되고 그것을 다시 조리장에게 맡겨 숨기게 되는데 그 사실을 들키게 되고 이에 조리장이 내놓기를 거부하다 삼켜버리게 된다.  이에 부함장인 최민수는 산채로 배를 갈라 열쇠를 끄집어 내게 된다.  이 상황을 좁혀서 보자면 굉장히 나름 긴박한 상황이다.  유령 전체 승무원의 목숨이 일본 잠수함에 의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이고 그를 벗어나기 위해 핵미사일 열쇠가 필요하다는 논리하에 배를 가르는 것이다.  언듯 봤을때는 전체 승무원의 생명과 조리장의 생명 사이에서 공리는 깔끔하게 계산된다.  전체의 생명이 더 크다.  하지만 핵미사일이 발사된 이후의 공리를 보자면 전체 승무원의 생명과 일본의 대도시 5개의 수천만명의 생명 그리고 방사능 후유증으로 인한 미래세대의 삶까지 생각해본다면 공리는 다시금 역전된다.  더욱이 설사 미사일을 쏜다 하더라도 그 승무원들의 생명은 전혀 보장이 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명령불복적 전범에 불과할뿐이다.  살아나온다 한들 총살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내세운 국가와 민족이라는 권위도 굉장히 위태로울 수 밖에 없는바 멀리 볼 것 없이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피해는 한반도와 동해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것이 뻔한 것 아니겠는가?                                                                                                       


미래세대의 문제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이 바로 미래세대와 관련된 부분이다.  공리주의가 가지는 강점 중 하나로 미래세대의 문제이다.  윤리적 이기주의의 경우는 미래 세대의 문제와 관련하여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후세대를 신경써야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논리적으로 타당하기에 뭐라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이기주의의 또다른 문제점중 하나이다.  반면 공리주의는 전체 사회의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표이고 이러한 전체 사회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포함된다. 예컨대 에너지 문제를 볼때 당장 우리에게 상관이 없는 하지만 미래에는 굉장히 위험해질 핵 발전 에너지는 미래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므로 나쁜 것이 된다.  하물며 핵무기의 경우는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장의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줄뿐더러 누구인지 알수 없는 미래세대의 자녀들에게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여기까지 계산이 들어간다면 더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는 목적론 뿐 아니라 의무론의 입장에서도 영화속에서 일본을 향해 핵미사일을 쏘는 것은 허용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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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지터스

    | 2012.08.29 07:27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무턱대고 뭐지? 하고 들어왔다가 1999산 유령에 관한 포스팅 이셨네요^^ 용짱님 포스팅 덕분에 오늘은 왠지 유령이 보고 싶어지는데요? ㅎㅎ 사실 전 아직 유령을 못봤거든요. 이번 기회에 한번 시청해 봐야될것 같아요.

  2. Lipp

    | 2012.08.29 17:12 | PERMALINK | EDIT | REPLY |

    헐리우드영화중에 이거랑 비슷한 작품 있지 않아요?
    두 인물대결과 설정도 그렇고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 ,, ㅎㅎ
    강의에 쓰실 내용인거 같아요.
    궁금한데 강의듣는 사람들 반응은 어때요? 쉽게 이해하나요?

  3. 바닐라로맨스

    | 2012.08.31 07:47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저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봤던 영화네요.
    영화를 보며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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