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녀, 실존주의와 제2의 성

Posted 2013. 8. 22. 09:53







하녀, 실존주의와 제2의 성

어둠이 내린 번화가 그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음식을 만드는 여성, 쓰레기 청소하는 여성, 전단지 뿌리는 여성 등  그 속에서 잘차려입은 한 여성이 옥상에 뛰어내려 자살을 감행한다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왜 자살을 감행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다만 바닥에 그려진 페인트와 핏자욱만이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걸 보여줄 뿐이다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이렇듯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제시하면서 극을 시작한다.  사회 밑바닥을 살아가던 은이(전도연 분)는 최고의 상류층 집안에 가정부로 들어간다어쩌다 그곳에 들어간 것인지는 생략된채 면접을 보고 곧바로 최상류층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은 최고의 상류층 집안인 훈(이정재 분)의 삶과 대비된다.  이 집안에는 나이든 하녀인 병식(윤여정 분)와 훈의 부인인 해라(서우 분) 그리고 해라의 딸 나미(안서현 분)가 생활하고 있다

보부아르와 프랑스의 여성인권

1949년 보부아르의 2의 성이 나왔을 당시 프랑스의 여성인권은 상당히 미약했었다.  여성들은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지 150년이 지난 1945년에 참정권을 획득하였지만, 이는 여성권의 향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2차대전을 잘 버텨낸 여성들에 대한 공로성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설사 투표권을 얻게 되었더라도 여전히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은 흔하지 않았으며 설사 교육을 받는다 한들 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취업을 위해서라는 인식이 상당히 강했다즉 가난한 여성이기에 일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교육을 받는다는 식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자신들과 관련된 담론을 널리 유포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보부아르가 2의 성을 발표했을때 그 충격은 상당했었다표현의 적나라함도 문제지만 그 주장 자체가 상당히 충격적이고 전복적이었기 때문이다물론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별거 아닐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시각에선 상당한 충격을 가져와 교황청에서는 금서목록에 올리기도 했었다

2의 성은 1970년 후반 미국에서 벌어진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에 큰 영향을 준다.  1970년대 초반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반전(反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데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상당한 성차별을 경험하게 된다같이 투쟁하고 싸웠지만 그 안에서 남성들은 또 다른 차별적 견해만을 드러냈을 뿐이다이에 페미니즘 운동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채 제2물결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며, 이때 가장 큰영향을 주게 되는 저서가 바로 2의 성과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이다.  특히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는 제2의 성에 큰 영향을 받은 저서로 알려져있다이렇듯 미국에서 벌어진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은 유럽과는 달리 제2의 성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되고 이러한 평가는 다시금 유럽으로 역수출된다

실존주의와 제2의 성

사르트르의 기본적 논의는 제2의 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인간은 신에 의해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 우연성의 질서에 속한다따라서 인간에게는 신에 의해 부여된 본질이나 존재의 목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오로지 인간은 상황 속에 던져진채 끊임없이 자신을 미래로 기투하여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단하여 창조하는 존재일 뿐이다이것이 바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이다.  존재자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로 나누어진다.  즉자존재는 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물을 말한다즉자존재는 의식이 없기에 다른 사물과 의식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이는 마치 속이 꽉찬 구슬 같은 것이다예컨대 꽃은 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물이다따라서 꽃은 다른 사물들과 의식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

반면 대자존재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말한다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예컨대 우리가 꽃을 한송이 보게 된다면 텅빈 의식은 그 대상을 향해 초월적 운동을 행하여 예쁘다 또는 안예쁘다 따위의 생각을 가지며 이때 인간은 꽃과 관계를 맺게 된다대자존재는 텅빈 무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이는 마치 속이 텅빈 구슬 같은 것이다.  대자존재인 인간의 텅빈 의식은 항상 무언가를 지향해야만 한다인간의 의식은 텅비어 있는 무의 상태로 있을 수 없으며 대상들에게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의식을 무엇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아야 하며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인간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기투하는 과정에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할 수 없다신은 부정되었으며 다양한 가치체계들도 나에게 큰 힘을 주지 못하며, 오로지 나의 힘과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나의 본질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그렇기에 대자존재인 인간은 평생을 존재의 불안에 휩쌓인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보부아르는 이러한 논의를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 확대시킨다남성은 대자존재에 위치시키고 여자는 즉자존재에 위치시켜 여성차별과 가부장제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타자를 하나의 물건처럼 바라볼 수 있지만 반대로 그 타자에 의해서 내가 물건처럼 보여질 수도 있는 존재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사람을 바라본다고 해보자일단 나는 그 사람을 하나의 사물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이때 그 사람은 내가 중심이 되어 형성한 세계에서 그 어떤 관계의 역할도 할 수 없는 완벽한 즉자존재에 불과하다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사물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내가 그를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그를 중심으로 나의 세계와는 다른 또 다른 세계가 형성되며 이때 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다른 예로 타인이 나를 바라본다고 해보자.  이때 나는 타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객체로서 전락하여 즉자가 되어 버리며,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의 세계는 끊임없이 균열되고 붕괴된다따라서 인간 상호간에는 시선의 투쟁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남녀 사이에서 이러한 시선의 투쟁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오직 즉자존재의 위치에만 서게 되고 여성이 남성을 즉자존재로 바라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남성은 자유와 초월성을 가진 대자존재로서 자신을 끊임없이 미래로 기투하여 창조할 수 있지만, 남성에 의해 즉자존재로 전락해버린 여성은 다양한 속박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이러한 여성의 삶은 사실상 동물과 같은 삶과 다를 것이 없다.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낳고 아이 키우는 등 아주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삶의 모습에 갇혀 있는 것이다하지만 인간은 단순한 살아가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는 실존(Existing)으로 존재해야할 필요성이 있으며 보부아르는 여성 역시 실존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선 여자란 무엇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  암컷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의 거의 절반을 구성하고 있다그럼에도 여자다움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여자로 존재하시오, 어디까지나 여자로 남으시오, 여자가 되시오하는 격려의 말도 듣는다그러나 온 인류의 암컷이라고 해서 반드시 여자는 아닌 것이다여성으로 간주되기 위해선 여자다운 것(여성성)으로 알려진 이 신비하고도 위협적인 현실에 여자는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여자답다는 속성은 난소에 의해 분비되어지는 것인가아니면 플라톤적인 철학의 공상에서 산출되는 것인가어떤 여자들은 이 여자다움을 구현시키려고 몹시 애쓰지만 그 모델이 무엇인지는 한번도 제시된 적이 없다.[1]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기의 유무를 넘어서 여자다운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을 습득하여야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자다운 것은 철저하게 남성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남성은 여성을 즉자존재로 전락시키면서 여성성이라는 특징을 부과하여 하나의 사물과 같이 길들이게 된다이에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여성의 경우는 차별을 받는 모든 피억업자들과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흑인이나 노동자 등은 자신들이 차별받고 있으며 계급적으로 한정지어졌다는 사실[2]을 정확히 인지한채 스스로를 대자존재로 일으켜세우려고 노력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자신들이 계급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채 여성 한명 한명 각각이 즉자존재로 전락해버린다예컨대 사회주의 혁명을 살펴보자노동자라는 계급은 그 사회의 경제적 약자로서 자신들이 경험하는 경제적 불이익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자본가에게 맞서게 된다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스스로를 대자존재로 여겨 자본가라는 대자존재와 상호투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며, 상호투쟁의 과정에서 자본가는 내출혈을 일으켜 많은 부분을 노동자에게 내어주게 된다하지만 여성은 여성성이라는 측면을 통한 단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예를 들면 흑인 여성이나 여성 노동자의 경우 흑인이나 노동자라는 계급적 특성은 뚜렷하게 부각되지만 여성이라는 특성은 부각이 잘 안되고 여성들 스스로도 이를 적극적으로 계급화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꽤나 많은 여성들이 남성지배에 공모한다는 점이다남성의 밑에서 즉자가 된 여성은 남성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에 붙잡혀 살아간다즉 자유롭고 초월적인 남성에게 종속 당한채 여성 스스로 자유를 추구하고 경제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피해버린다이 과정에서 여성은 사랑, 나르시즘, 신비주의 등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한다남자에게 헌신하는 것을 사랑과 연예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나르시즘을 통해 거울 속에 갇힌 자신을 숭배하며, 이런 모습을 숭고함을 통해 정당화한다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은 점점 더 객체로 전락되고 남성의 지배적 권력은 더욱 신성시된다이에 보부아르는 여성들 스스로 우리들이라는 말을 통해 계급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집단적 주체로서 자리매김하여 남성들과 상호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스스로 남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되는 것은 문제의 근본적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  오로지 계급성을 인식하여 스스로 집단적 주체이자 대자존재가 되어 남성집단과 상호투쟁할 수 있을때 여성해방이 가능하다이때의 상호투쟁은 서로가 서로를 즉자로서 끌어내리기 위한 형태가 아닌 우애와 이해를 통한 평화적인 상호인정을 의미한다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할 부분은 여성의 경제적 해방이다남성의 경제력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을때 진정한 여성해방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여성해방의 길은 남성에게도 상호인정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즉 여성해방은 곧 남성해방 뒤이어 인간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녀와 가부장적 여성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철저하게 여성들의 시각에서 그리고 여성들의 어떤 적대 관계를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해라는 남편인 훈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완벽하게 종속된 인물이다그녀는 스스로 노동을 하지도 않은채 남편의 부에 입각하여 하녀들을 부리며 그녀들 위에 군림한다아름답고 예쁜 몸매를 계속 유지하여 남편에게서 사랑을 얻고 많은 아이를 낳아 그에게 안겨줌으로써 여성의 임무를 다하려 한다해라는 훈의 성적 만족을 위해 성기와 구강 등을 이용하여 최선을 다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가진 훈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여자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당연하다자신의 부인은 아이를 낳아주기 위한 존재에 그치고 장모님 역시 자신이 구매한 물건 정도의 위치에 불과하다물론 해라와 해라의 엄마(박지영 분) 역시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한채 훈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지속적으로 종속당하려 노력한다이러한 상류층 여성들의 삶은 실존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살아가는 것에 가깝다.

단순히 살아가기에 급급한 삶의 모습은 상류층 여성들뿐만 아니라 하류층 여성들에서도 쉽게 확인된다집안의 오래된 하녀인 병식은 아니꼽고 드럽고 매스껍고 치사해도 훈의 돈을 바라보며 꾹 참아낸다그 어떤 인격적 모멸감에도 아들하나 잘키워보겠다는 열망으로 버텨내 아들을 검사로 만들어낸 대단한 인물이기도 하다보부아르에 따르면 경제적으로 자립한 여성은 남성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벗어나 여성해방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지만 병식을 통해서는 그런 측면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이 작품 초반 5분에서 꽤나 많은 여성들이 노동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들이 과연 진정으로 남성의 속박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이는 여성이 노동은 하되 각기 개별적으로 노동을 하기에 생겨나는 문제이다여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바라보아 서로가 연대하여 투쟁하기보다는 각자가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노동을 하기에 한계가 드러난다.

  사실 이런 측면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흔하게 발견된다예를 들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생각해보자그들은 분명 같은 여성이지만 그들 사이의 연대성과 자매애를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시어머니의 입장에선 며느리의 존재가 탐탁치 않다평생을 두고 쌓아온 자신의 가족이라는 존재의 테두리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타자가 그것을 위협하기 때문이다이때 시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할까며느리를 하나의 대자존재로서 인정한다면 시어머니는 꽤나 많은 것을 며느리에게 내주어야 한다즉 내출혈을 일을켜 존재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그렇기에 많은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대자존재로 인정하기보다는 즉자존재로 바라보아 스스로 이룩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같은 여성으로서의 연대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하녀에서 병식 역시 마찬가지이다병식은 같은 하녀인 은이와 연대하려하지 않는다도리어 은이의 임신 사실을 해라의 어머니에게 고해바쳐 은이를 위험에 빠트린다병식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들때문이다오직 아들을 위해서 모든 아니꼽고 더러운 것들을 참고 감내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해라가 침대에 누워 책을 보는 씬이다그 장면에서 해라가 보는 책은 바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다굉장히 아이러니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해라는 이 책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자신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아니면 여성들은 연대하여 집단적 주체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것그 무엇이 되었건 해라는 보부아르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그녀는 남편의 지위에 기대어 스스로 즉자존재가 된채 또 다른 여성을 즉자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시선의 투쟁은 남녀간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 벌어진다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즉자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해라는 스스로 느낀 존재적 비하감을 또 다른 여성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훈에 의해서 사물로 전락한 해라는 자신이 부리는 하녀들을 사물로 전락시켜 스스로를 대자처럼 여기고자 한다하지만 이는 실존적 삶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다왜냐하면 해라는 스스로 자유롭고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자한 것이 아니라 훈이 만들어낸 가부장제에 기대어 그것을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이다해라는 남성지배에 공모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임신한 부인을 통해서는 무언가 부족해서일까훈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은이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물론 이에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훈은 한번의 섹스로 어마어마한 돈을 지급한 것이다은이가 어떤 마음으로 섹스에 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섹스를 한 다음날 자신에게 돈을 주는 훈을 바라보는 눈빛은 평범하지 않다훈의 사랑을 바랬을까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아마 은이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룻밤 쾌락으로 바라보기도 힘든면이 있다은이는 은근히 훈을 기다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남자를 바랬건 돈을 바랬건 사랑을 바랬건 무엇이 되었든 이때부터 은이는 훈에게 종속된다결국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훈에 의해서 완벽하게 즉자적 존재로서 전락해버린다그리고 자신의 실종된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상위의 여성은 하위의 여성을 다시금 즉자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관계는 은이가 임신을 한 이후 더욱 심각해진다병식은 은이의 임신 사실을 해라 어머니에게 고해바치고 이에 해라 어머니는 높은 곳에서 청소하는 은이를 일부러 밀어 떨어지게 만든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중심에 놓은채 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해라와 해라의 어머니는 훈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지위를 스스로 인정한다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걸 다 가졌고 자기가 하고 싶은건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절대적 지위훈은 돈이 부여한 그 지위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에 놓인 사물로 전락시킨다훈의 시선 앞에 놓인 인간이 자유를 가진 초월적인 존재로 서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훈은 자본을 가진 자로서 그의 생각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남성의 대자적 지위라는 것도 그 이면에 있는 어떤 것 예컨대 자본 따위에 의해 형성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은이는 해라의 어머니가 몰래 넣어둔 낙태약을 보약으로 착각하여 먹게 되고 결국 아이는 낙태된다자신의 운명도 모른채 은이는 훈에게 당신같은 분 아이를 가져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감사를 표한다훈은 자신의 부인과 장모가 은이의 아이를 지우려고 시도했다는 얘기를 듣고 격노한다그런데 이 격노의 느낌이 상당히 불편하다훈은 자신의 아이가 부정한 방법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격노하는 것이 아니다그는 자신의 발밑에 놓여있는 부인과 장모가 감히 자신을 움직이려했다는 사실에 격노한다아이를 살리건 낙태하건 모든 결정은 오직 그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인데 사물에 불과한 존재들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훈의 권리를 좌지우지하였기에 격노한 것이다훈의 발밑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훈의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이 작품의 모든 여성들은 철저히 훈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고 길들여진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아이의 죽음 이후 은이와 병식은 많은 부분에서 변하게 된다병식은 은이에게 자신이 임신 사실을 고했노라고 고백하며 미안하다고 한다자신은 뼛속까지 이런 여자라고 말하며 돈을 주어 보내려하지만 은이는 이를 거부한다은이는 복수할거라고 찍소리라도 내봐야겠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 불가능하다사실 은이가 바랬던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자신에게 친절한 예쁜 딸을 낳는 것딸이라고 표현하지만 결국 가난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하나의 인간으로 상호인정해줄 수 있는 타자를 원한 것이다하지만 이 꿈은 무너지고 주변 사람들은 없었던 일로 치고 잊으라고 요구한다은이가 하나의 완전한 주체로서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은이는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한계 그리고 가난한 노동자라는 계급적 한계에 갇혀버린채, 자신은 사물이 아니라 자유와 초월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존재에 불과하다이에 그녀는 나미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긴채 자살한다.  은이의 죽음은 극의 초반 이름 모를 여자의 죽음과 만난다누군가는 죽었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한개인이 선택한 비극적 죽음은 순간의 흥미만을 이끌어낼뿐 궁극적인 문제를 환기시키진 않는다이것이 바로 여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노동자가 자살을 한 경우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어 많은 문제점이 환기되는 것을 목도하곤한다그의 죽음을 모두가 애도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하지만 하녀에서 등장하는 죽음은 그러한 상황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그 이유는 집단적 주체로서 설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노동자라는 계급성은 노동자로 하여금 집단적 주체로 설 수 있게 하여 자신들을 규정짓는 폭력적인 대자존재와 상호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하지만 여성은 집단적 주체가 되는 일이 거의 없기에 그녀들의 죽음은 묻혀진다물론 여성들도 노동자라는 측면이 부각된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죽음이 부각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 작품에서 그런 가능성은 애시당초에 사라진다은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병식과의 계급적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해라와 해라 모 역시 그 죽음을 귀찮아하고 짜증내할 뿐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할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이야기한다이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사실 나라는 존재가 타자의 의식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지는 아무도 모른다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오롯이 타자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나를 기억해달라는 것은 막다른 곳에 몰린 자가 외치는 인정욕망에 다름이 없다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투쟁의 관계 그리고 이를 넘어선 완화된 상호 인정의 단계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애시당초에 하나의 사물로서 전락해버린 인간은 제대로 인정받는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대자존재인 타자의 의식 속에서 동물과 다를바 없는 사물로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때의 인간은 지배적 권력을 가진 주체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에 불과하다하지만 우리들이라는 계급적 연대를 통해 집단적 주체로 자리매김하여 지배적 주체와 상호투쟁의 관계로 나아간다면 그 관계 속에서 완화된 상호인정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보부아르, 2의 성, 조홍식 옮김, 을유문화사 p9~10 / 2의성, 이희영 옮김, 동서문화사 p11~12

[2] 지배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백인 남성 집단은 스스로 대자존재의 위치에서 흑인, 유태인, 노동자 등을 즉자존재로 전락시킨채 무엇으로 규정지으며 이러한 규정성에서 그들의 계급성이 도출된다.



  1. 여강여호

    | 2013.08.22 11:08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성평등의 문제가 어쩌면 여전히 남성 의존적인 여성의 타성에 의해 생각만큼 진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참새짹짹

    | 2013.08.29 13:53 | PERMALINK | EDIT | REPLY |

    좋은 글이네요... 읽으면서 갇혀있는 느낌 때문에 가슴이 먹먹하고 힘들었습니다.

  3. 눈송

    | 2013.08.29 16:40 | PERMALINK | EDIT | REPLY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봤던 영화 장면이 떠오르면서 이해가 팍팍 되는군요

  4. 사비

    | 2013.10.06 03:57 | PERMALINK | EDIT | REPLY |

    뒤늦게 영화를 보게 되어 검색하다가 찾아오게되었는데요 쓰신 글을 보니까 왜 중간에 해라가 제2의 성을 읽고 있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5. ^^

    | 2013.10.30 20:13 | PERMALINK | EDIT | REPLY |

    좋은글 정말 감사합니다

  6. 빛츠

    | 2013.11.02 20:21 | PERMALINK | EDIT | REPLY |

    글이 좀 흑백논리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이런 관점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7. | 2013.11.14 00:35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8. 한점바람

    | 2013.11.14 10:04 | PERMALINK | EDIT | REPLY |

    아...즉자와 대자....내공이 대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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