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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2013), 종교적 체험의 마술적 효과 본문

영 화/10's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3), 종교적 체험의 마술적 효과

유쾌한 인문학 2013. 2.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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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신비적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프랑스령 폰티체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시종일관 대립되는 두 지점을 보여주게 되고, 주인공인 파이는 그 두지점의 경계를 헤매이는 양상을 보여준다.  폰티체리에 대한 배경 설명에서부터 프랑스와 거의 흡사한 지역과 원래 살던 인도인들이 살아가던 공간이 극명하게 나뉜다.  폰티체리는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의 한 지역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라는 설정이 흥미로운데 이는 정신문화가 극도로 발전한 인도와 근대 합리적 이성의 중심인 프랑스로 나뉘는 지점이다.  근대 열강들이 보여주었던 식민지배의 이면에 흐르는 사상은 바로 계몽주의이다.  그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하여 계몽이라는 미명하에 침략을 행하게 되고 합리성이라는 이름하에 경제적 수탈을 감행한다.  물론 이러한 측면이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식민지라는 말 속에 담긴 그 함의는 파이의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줬을 거라고 판단된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은 파이의 가족으로 이어진다.  파이의 아버지는 인도인으로서 냉정한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식민지배를 받는 인도인들은 서구 유럽 열강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실 식민지배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경제적인 측면에 있다기보다는 그들이 과거부터 유지해왔던 정신문화의 붕괴에서 찾을 수 있다.  피식민지배인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저들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더욱이 서구인들이 행하는 근대적 교육은 철저하게 이성중심적인 것으로 그들의 문화와 기존의 교육방식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이러한 이성중심적 교육과 합리적 사고관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중요하며 도리어 필수적이기까지 한 것이 현실이다.  다만 그것을 위해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그것을 이안감독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파이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경계를 어슬렁거리는 인물이다.  아버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합리성과 이성중심적 사고관의 중요성을 교육받지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든다.  처음엔 힌두교의 신들을 통해서 내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우주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이윽고 그는 예수를 만나면서 종교가 이야기하는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된다.  예수가 말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파이의 마음에 쏙 들게 된다.  즉 힌두의 신을 통해서 내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우주를 믿으면서 예수를 통해 사랑을 확인한 것이다.  파이는 다시 이슬람교에 귀의한다.  그는 아라비어 말도 할줄 모르고 그들의 경서를 읽을 줄도 몰랐지만 그들이 경전을 읽는 소리와 어떤 느낌이 신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기도의 과정에서 평온함과 더 큰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힌두교나 카톨릭을 버린 것은 아니며 세 종교를 전부 신봉한 것도 아니다.  파이는 종교들 이면에 흐르는 거대한 힘을 느꼈을 뿐이며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날 파이는 자신의 동물원에서 키우는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다가가 그의 눈에서 어떤 신성을 보려고 시도한다.  이는 세계 만물 모두에게 담겨있는 어떤 성의 확인이다.  이에 그는 호랑이에게 다가가 그것을 확인하고 느끼려고 하지만 호랑이는 호랑이일뿐이다.  호랑이가 대면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극적으로 돌아와 팔이 잘리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파이는 그 이후 세상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은채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와중에서도 파이는 지속적으로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해매게 된다.  시에서 주어지던 동물원에 대한 지원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가족은 캐나다로 이주를 결정한다.  거대한 화물선에 동물들을 다 실은채 캐나다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게 되고 화물선은 침몰한다.


가족을 다 잃은채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한 파이는 작은 구조선에 메달린채 폭풍에 휩쓸리게 되고 이때 리차드 파커도 탈출에 성공하여 구조선에 탑승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리차드 파커가 구조선위에 올라서자 깜짝 놀란 파이는 바다속으로 도망가게 되는데 그 속에서 그는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게 된다.  거대한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뒤로 한채 물속에 잠수하여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이다.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슬픔, 죽음에 대한 공포, 분노,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까지.  작금의 상황에서 파이의 감정상태는 말그대로 혼란의 뒤범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성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절대적 절망의 상태이다.  그때 물속에서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는 파이의 심경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침몰하는 배의 모습은 한편으로 신비롭고 두려우면서 심지어 장엄하기까지하다.  물밖에서 벌어지는 극도의 혼란상과는 다르게 물 안에서는 고요한 장엄함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때 파이가 느낀 감정을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 감정으로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무한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있는듯한 수동적 느낌.  이러한 느낌의 체험은 일련의 종교적 체험으로 볼 수 있다.  


뒤의 이야기는 파이와 리차드 파커의 투쟁적 일대기이다.  구조선박에 둘만 남은채 포류하며 투쟁하듯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파이가 경험하는 것은 놀라운 자연의 경이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 파도조차 없는 바다는 하나의 거울처럼 되어 하늘을 비추게 되고 이에 배는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듯이 느껴진다.  어느날 밤 수많은 해파리들이 야광빛을 뿜어내며 바다를 물감처럼 빛낼때 거대한 향유고래가 점프하는 장면은 경이의 궁극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자연은 오토의 누멘적 대상 그 자체이다.  만물이 하나되는듯한 체험, 생존 자체가 위험한 상태에서 우연히 다가오는 날치들, 거대한 폭풍에 이르기까지 이 수많은 누멘적 요소들은 파이에게 신비적 체험을 선사하고 파이는 자연을 통해 성(聖)을 확인하게 된다.  극중에서 파이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이나 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인격화된 형태의 성을 표현하는 방식일뿐 그가 느낀 것은 거대한 실재로서의 성이다.  신비적 체험은 현상 너머에 있는 어떤 본질을 직관할 수 있게 해준다.  바람조차 없는 고요한 밤 리차드 파커가 어딘가를 멍하게 바라보는 것을 본 파이는 자신 역시 바다 속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때 시간과 공간은 그 영겁의 순간을 뛰어넘은채 순식간에 파이 앞으로 다가온다.  모든 동식물과 우주만물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서 이루어지는 전체성의 경험인 것이다.  이때 파이는 리차드 파커와 어떤 영적인 교감을 이루게 된다.  이른바 누멘적 감정의 확인인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다시금 다가온 거대한 폭풍은 파이에게 있어 더이상 단순한 폭풍이 아닌 신 그 자체이다.  파이는 신에게 외친다.  도대체 원하는게 무엇이냐고 나에게서 모든걸 다 뺏어가놓고서 또 무엇을 원하느냐고 말이다.  파이의 외침은 분노의 표현이자 구원에 대한 열망이자 초월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사실 이러한 감정을 스크린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이안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그 의문을 일소에 해결해버린다.  이 작품은 주제의식과는 별개로 뛰어난 영상미로 유명한데 이 영상미는 실재하는 것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디지털로 만들어진 영상이다.  즉 가짜를 통해서 극 사실적인 영상을 재현하고 심지어 이 가짜는 우리에게 깊은 종교적 체험을 전달해준다.


파이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육지에 상륙하여 구조된 이후 일본인 선박회사 직원을 만난 파이는 그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해주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이에 파이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사실 어머니와 요리사 그리고 불교신자와 한명의 선원이 살아남았었는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급기야 파이는 혼자서 살아남아 요리사의 시체를 이용하여 살아왔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두번째 이야기를 수긍한채 돌아가게 된다.  이때 파이는 소설 작가에게 묻는다.  어떤 것을 믿고 싶으냐고 말이다.  파이가 말해준 두번째 이야기는 전형적인 속의 이야기이다.  반면 자신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첫번째 호랑이 이야기는 성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 두이야기의 관계는 이성과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철저하게 이성 위주로 판단한다면 두번째 이야기가 진실일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두번째 이야기의 진실성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드러낸다.  특히 식인섬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징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믿음의 문제로 넘어간다면 첫번째 이야기가 진실이 될 것이다.  


마치 2지선답 선택의 문제처럼 보이지는 이 두가지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 선택의 문제로 바라볼 수 없다.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두가지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다.  성과 속은 뚜렷하게 대립되는 두개의 실재가 아니다.  성이 없으면 속도 없고 속이 없으면 성도 없다.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파이에게는 두가지 모두가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는 마술적 효과를 통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만약 파이가 철저하게 이성만을 중시한채 바다를 표류하였다면 호랑이라는 존재는 없었을 것이며 홀로 바다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다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대로 파이가 신비적 체험만을 중시한채 이성을 배제하였다면 그는 진작에 식인섬에 잡아먹혀 죽었을 것이다.  아니 식인섬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파이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 아버지의 가르침이 자신을 살린 것이다.  하지만 파이는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이성을 기치에 둔채 신비적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본질만 바라본다면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질에 앞서는 실존에 대한 체험과 그 믿음은 호랑이를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믿음을 통해 존재하게 된 호랑이는 생존이라는 본질에 영향을 주게 된다.  결국 믿음이 본질을 바꾸게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비적 체험과 믿음이 가져온 마술적 효과이다.  그렇다면 두가지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이성의 지배에 함몰된채 현대인이 상실해버린 종교적 체험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의 삶은 이성과 합리성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고 지속적으로 닥쳐오는 자신의 실존적 위기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지나치게 이성만을 강조하는 현대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실존적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채 심각한 허무주의나 삶의 무의미성으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성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신비적 체험만을 강조하게 되면 이는 생존 그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결국 균형이 중요한 것이고 이러한 균형을 통해 온전한 인간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지속적으로 느끼는 실존적 위기는 의외로 이성이 아닌 신비적 체험과 종교적 믿음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균형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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