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타이타닉(1997), 사회주의 여성론 본문

영 화/90's 영화

타이타닉(1997), 사회주의 여성론

유쾌한 인문학 2015. 6. 18. 23:26
반응형





타이타닉, 사회주의 여성론

타이타닉호는 1911년 영국의 화이트스타사가 제조한 초화화 여객선이다.  4 6천톤급 이상의 여객선으로 프랑스의 쉘부르와 아일랜드의 퀸스타운을 거쳐 뉴욕으로 향하다 4 14 23 40분에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타이타닉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총아로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배이다.  이 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이루게 되며 항해하는 순간만큼은 완전한 독립된 세계로서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법, 자본, 계급 모든 것을 담은채 항해한다.  결국 이 배는 하나의 완벽한 소우주이자 자본의 총아가 되는 것이다.  특히 이 배에서 주목할 점은 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이다.  배의 밑바닥에서 최상층까지 돌아보면 하나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계급적 요소 즉 노동자 계층과 부르주아 계층의 모든 것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배는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지배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  쉽게 말해 상부의 선장이 피라미드 형태의 극점에 선채 배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피라미드의 하층인 타이타닉의 하부는 선장의 명령에 복종한다.  물론 모든 생산과정은 하부구조에서 이루어지며 상부구조는 전체의 지배와 문화를 향유할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측면은 배가 침몰하는 순간 그 편협함과 왜곡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르크스 이론의 기본 개념

자유주의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로서 이성과 사고능력 따위를 들지만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런 정신적인 측면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여느 동물들과는 다르게 생산활동과 생존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로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간의 특이성을 통해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한다.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 중 물질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정신은 2차적인 것이자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바라본다.  역사의 발전은 인간의 정신이나 헤겔의 절대정신따위가 아닌 물질적 생산 방식의 변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물질적 생산 활동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인 것이다.  인간은 살아남기위해 지속적으로 기술을 발전시켜 생산량을 향상시키며 이를 통해 생산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증가된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정치, , 제도, 문화, 사상에 변화를 가져온다.  예컨대 농사를 위주로 생산이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농노와 지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주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이에 입각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근대에 이르러 증기기관이 발명되어 생산력과 물류의 유통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때부터는 농노보다는 임금 노동자를 활용하는게 더 중요해지고 이에 자본주의라는 제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생산활동의 근간이 변화하게 되면 그에 맞추어 법과 문화, 사회 제도가 같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활동의 근간을 하부구조라고 본다면 법과 사회제도, 문화 따위는 상부구조라고 볼 수 있으며, 하부구조의 변화는 상부구조의 변화를 가져온다.  상부구조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의 발전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상부구조는 다시금 역으로 하부구조의 생산양식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보통 이미 존재하는 상부구조에 의해서 하부구조가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부구조에 의해서 상부구조가 규정되며 그렇게 규정된 상부구조가 역으로 하부구조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태도이다.[1]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산양식을 중심에 놓은채 인간의 역사는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마지막으로 공산주의로 나아간다고 본다.

사회주의자들에 의하면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는 전형적인 권력관계 체제로서 다양한 자본적 거래에 입각한 착취구조로서 그려진다.  즉 증기기관 따위로 대표되는 생산시설의 발전은 급격한 생산량의 향상을 불러오게 되며 이러한 하부구조의 변화는 자본주의라는 상부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지만, 자본주의는 다시금 하부구조의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도록 교육시키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는 생산물을 단순히 물물교환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를 취하기 위해 생산한다.  자본가가 어떤 상품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노동력에 대한 대가와 실제 상품의 가치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하게 되고 이것이 잉여가치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대가만을 지불하며 노동자가 창조해낸 잉여가치에 대해선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본가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노동자에게 더 많은 노동력을 투여하도록 강요한다.  노동력을 착취하면 할수록 잉여가치는 더욱 커진다. 

자본가는 모든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기에 노동자는 착취당할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착취당하거나 노동하지 않거나 둘중 하나의 선택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노동력은 수치화되고 교환관계에 놓이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바로 이지점에서 지독한 인간 소외가 발생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활동을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입각하여 자신의 꿈과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산활동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노동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본질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러한 노동의 신성함을 왜곡한채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노동자들이 자기실현에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버린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점차 자신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게 된다.  물론 계급 인식이 쉽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건강보험 제도 따위를 제시하여 노동자를 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계급의식이 싹트게 되고 노동자가 자신들을 동일한 계급적 동반자로서 인식하게 된다면 계급 투쟁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며 이때 그 사회는 혁명적으로 전복된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2]과 혁명 이후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기반을 둔채 가족관계에 대한 연구를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초기의 가족의 형태는 군혼(Gruppenehe)의 상태였다고 말한다.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는 서로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며 여기에 질투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근친, 원친, 단순한 인척의 순으로 성관계가 금지되면서 성행위와 혼인이 가능한 상대방이 줄어들게 되어 이때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와 혼인하는 대우혼 관계가 성립한다.  대우혼 관계는 야만과 미개의 경계에서 형성되는 가족관계로서, 근친과 원친을 넘어 단순한 인척 관계까지 혼인이 금지되면서 부족 내의 결혼이 가능한 남녀의 수는 점차 작아지게 된다.  이에 각각의 남녀는 혼인 이후 서로를 소유물로서 주장하기에 이른다.  각각의 남녀가 혼인을 하게 되면 남자는 여자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는 여성이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이며 이를 통해 엥겔스는 초기 대우혼 사회가 모계사회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농경과 목축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하부토대가 바뀌게 되자 자연스럽게 상부 토대의 가족관계도 바뀌게 된 것이다.  남자들은 가축을 길들이고 사육함으로써 상당한 수준의 부를 축적하게 된다.  경제력의 중심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이동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재산 상속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가축은 새끼를 낳아 잉여 가축을 생산한다.  잉여 가축의 존재는 필요 이상의 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남성들은 이러한 잉여 가축을 자신의 생물학적 자손에게 상속시키기를 바랬으며 이를 통해 모권사회는 무너지게 된다.  아이의 어머니는 확실하게 알 수 있고 증명될 수 있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남자들은 아내의 정절을 얻기 위해 일부일처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결국 일부일처제라는 것은 경제적인 하부조건의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족의 형태에 불과한 것이 된다.[3]  따라서 현대의 여성들은 가장 먼저 가부장으로부터 해방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사회적 규모의 생산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또 그들이 돌보아야할 가사가 아주 적을때 비로서 가능해질 것이다.[4]  즉 공적인 생산영역에 참여함과 동시에 가사와 육아가 사회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여권에 대한 상당히 진일보한 관점이다.

1917년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게 되지만 그 결과로 여성해방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가정일은 사회화되지 못한채 여성들의 몫으로 남았으며 이는 반드시 책임져야할 일로 여겨지게 된다.  더욱이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일들은 남자들이 하는 일보다 훨씬 못하고 가치 없는 것들이었다.  이에 여성들은 상당히 낮은 지위로 떨어지게 된다.  사실 앞서 지속적으로 살펴본바와 같이 가정일이 사회적인 일로서 전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사회적 생산활동은 여성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간다.  이는 베티 프리단의 슈퍼우먼 문제와 일치한다.  즉 자본주의이던 사회주의이던 여성들은 슈퍼우먼을 강요받으면서 상당히 억압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줄리엣 미첼의 여성의 지위

영화 타이타닉은 갑판 위(상부구조)에서 벌어지는 부르주아 계층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매일 같이 열리는 파티와 엄격한 예의범절에 입각한 식사.  뚜렷하게 구분되어지는 남성과 여성의 삶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뛰어든 잭 도슨(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 분)의 모습까지.  갑판 위의 구성원인 로즈(케이트 윈슬렛 분)는 자신의 삶에 대해 극심한 회의감에 빠져든 상태이다.  자유를 추구하며 스스로 삶을 결정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말이다.  로즈의 얄굳은 운명은 집안의 몰락 때문이다.  로즈의 어머니(프란시스 피셔 분)는 자신의 딸을 최고의 부자인 칼 헉슬리(빌리 제인 분)에게 시집보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한다.  숨막히는 상류사회의 삶에 질려버린 로즈는 자살을 하려하지만 이를 3등석 승객인 잭이 구해주게 되고 그 이후 둘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아가면서 사랑에 빠져든다.

여성이 처한 상황은 어떠한 다른 억압된 사회집단의 상황과도 다르다.  즉 여성은 인류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생산구조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한 노동상황은 여성의 처지를 항상 남성 중심세계 속에 있도록 규정할 것이다. ... 여성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족이라는 것도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문화적 산물이다.  여성의 성격이나 역할이 한결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형태와 역할에 있어서도 필연적인 것이란 없다.[5] 

줄리엣 미첼에 의하면 여성의 지위는 ① 생산  ② 자녀출산  ③ 성관계  ④ 자녀의 사회화에 의해 복합적으로 결정된다.[6]  생산의 영역에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는 낮은 지위와 낮은 봉급의 일만이 부여되었으며, 근대의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극중의 로즈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겉으론 강하고 고귀한것처럼 행동하지만 나약하기 그지 없는 여성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딸을 돈이 많은 가문에 시집보내 고귀한 삶을 영위하는 것뿐이다.  로즈가 지속적으로 잭과 어울려 다니며 자신의 삶을 찾으려하자 그녀는 내가 재봉사로 일했으면 좋겠느냐?며 끊임없이 딸을 돈많은 가문으로 팔아넘기려한다.  이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로즈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린 여자이기에 그건 당연한 것이다.  여자에게 선택권은 없다. 

이러한 로즈 어머니의 태도는 자녀의 사회화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로즈는 더이상 잭을 만나지 말라는 주변인들의 협박에 가까운 충고에 의해 그를 거부한다.  하지만 어느날 식당에서 여성이 갖춰야할 예절을 배우고 있는 한 꼬마아이를 보게 되자 더이상 저런식의 억압적인 삶을 살지 않기로 결심한채 잭에게 돌아간다.  그 이후 둘은 배의 선두에서 두팔을 펼친채 하늘을 나르는듯한 자유를 만끽한다.  로즈의 자유를 향한 결심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성으로서의 운명에 대한 거부이다.  여성의 생물학적 역할은 자녀의 사회화의 담당자라는 문화적 천직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자녀를 양육하는데 적합하다고 하는 것은 여성의 생리적 조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7]  여성은 아이를 양육해야하며 특히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자신과 동일한 삶을 반복할 수 있도록 재교육시키게 된다.  이러한 재교육 기능은 여성의 본질과 운명이라는 미명하에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여자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말의 함의인 것이다. 

칼 역시 로즈를 원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로즈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선 상당히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로즈가 잭과 함께 3등석 파티에 참여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상당히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칼이 로즈에게 앞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그녀는 나는 당신의 말만 따르는 노동자가 아니다.  난 당신의 약혼자이다.라고 항변한다.  이에 칼은 음식을 뒤엎으며 남편을 공경하듯이 자신의 말을 잘 따르라고 강요한다.  칼에게 있어 로즈는 예쁜 인형이자 소유물에 불과하다.  이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미첼의 세번째 요소인 성관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은 출산을 할 수 있는 생산자로서의 기능을 넘어 남성의 쾌락을 위한 성적 대상으로서 여겨진다.  가부장은 여성을 소유하길 원한다.  성적 대상으로서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소유물이자 자식을 낳아줄 수 있는 생산자로서의 소유물이다.  특히 생산의 측면에서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확실한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이 중요하기에 여성은 가부장을 공경해야 한다.  문제는 로즈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칼은 예쁘고 매력적인 성적 대상으로서의 로즈를 원하지만 그녀가 정숙한 여성으로서 확실한 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은 없을 것이다.  이에 그는 잭을 함정으로 몰아넣어 잭과 로즈를 위험에 빠트리게 된다. 

자본주의의 속살

영화 타이타닉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화이트스타사의 이사가 선장에게 기록을 깨고 싶다는 말을 하는 부분이다.  맹목적인 속도경쟁인데 이러한 속도 경쟁의 결과는 참혹하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고 속도를 유지하였기에 빙하의 출연 이후 그 대처가 늦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배는 침몰하게 된다.  타이타닉은 배의 아름다움을 위해 구조선을 반만 싣게 되고 그 결과 승객의 절반은 전부 죽게 된다.  물론 그 대상이 하부구조의 사람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할까?  상부구조의 고귀한 삶을 하부구조가 끊임없이 떠받쳤지만 결국 작은 소우주가 무너지고 붕괴되는 그 순간 희생되고 버림받은 것은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로 점철된다.  만약 자본의 욕망에 따라 과하게 속도를 올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배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하류층의 사람들도 살 수 있었겠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배의 침몰은 자본주의가 가져올 수 밖에 없는 내부적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같은 배에 탑승하고 있지만 갑판 위와 갑판 아래의 계급은 분명히 다르다.  다르지만 하부구조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차피 같은 배를 타고 있지 않느냐는 교묘한 자본주의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자본은 상부구조만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겉으론 여자와 아이들 먼저 살린다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상류층 여자와 아이들이 먼저인 것이 현실이다.  생산 토대에 의해 상부구조가 형성된다고 하지만 역으로 하부구조를 다시금 지배하는 것은 상부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근대 자본의 총아인 타이타닉의 침몰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하부구조 사람들의 몰살은 당시 자본이 보여준 비인간성을 잘 보여준다.



[1] 아이히호른, 역사적 유물론, 이상훈 장은주 최경 옮김, 동녁 출판사

[2]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김대웅 옮김, 두레 출판사

[3] 위의 책, p45~126

[4] 위의 책, p282

[5] 줄리엣 미첼, 여성의 지위, 이형랑ㆍ김상희 옮김, 동녁 출판사, p101~102

[6] 위의 책, 5장 여성의 지위Ⅰ, p101~128

[7] 위의 책, p12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