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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긴 어게인(2013), 나와 당신의 길이 어긋나는 순간 본문

영 화/10's 영화

비긴 어게인(2013), 나와 당신의 길이 어긋나는 순간

유쾌한 인문학 2016. 3. 1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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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일이다. 놀이터 앞 벤치에 앉아서 세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새로 이사를 온 듯한 한 아이가 쭈볏거리며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넷이 같이 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심 마음 깊은 곳에선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그렇게 쉽게 친해지는건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 명의 아이들이 갑자기 홀로있던 아이를 불렀다. 그리곤 “야!! 너 우리랑 놀고 싶지?” 하고 묻는거였다. 어허 처음보는 아이에게 이런 돌직구라니. 그런데 다음 말은 더 놀라웠다. “우리랑 같이 놀자.” 처음 본 낯선 이에게 다짜고짜 같이 놀자니? 어른들에겐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한마디가 아이들에겐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릴땐 관계 맺기가 저렇게 쉬웠는데 왜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 지는 걸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관계 맺기 속에서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진리를 찾을 수 있지도 모르겠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단순해 보이는 이 한문장은 꽤나 많은 의미를 담게 된다. 그는 기존의 진리라 여겨진던 모든 것은 너무 불확실한 토대위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확실한 진리를 찾고 싶었던 그는 한가지 사고 실험을 전개한다. 전지전능한 악마를 하나 가정하여 모든 것들을 의심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눈 앞에 있는 책을 보자. 우리는 흔히 이 책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책은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악마가 속인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나의 신체도 있다고 감히 말하기 어렵다. 언제든지 악마가 속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의심한 끝에 얻어낸 결론은 의심하고 있는 자아만은 결단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의식적 자아만이 확실한 진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즉 세상 모든 것이 전부 의심스럽더라도 ‘생각하는 나’만큼은 유일한 진짜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단 하나의 확실한 정초점으로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였고 이를 기초로 하여 의심스러운 모든 것들을 새롭게 증명해나가기 시작한다. 즉 인간은 더 이상 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자신의 자아를 중심에 놓은 채 다른 모든 존재를 근거 지우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데카르트 합리론의 기본 태도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생각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켜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나는 내가 주인인 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 말은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적 운명을 잘 표현한다. 구성한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는 몇가지 구성물을 가지고 전체를 짜맞춰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성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과는 다르다. 타인이나 물건이 되었건 좋아하는 일이 되었건 하나하나 가져와서 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넣은 나의 세계이니깐 그곳에서 나는 주인이자 초월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더 확장하고 성장해나갈 수 있다. 갖난 아기이던 시절 아이가 가진 세계의 크기는 극히 작겠지만 성인이 되었을때 그가 가진 세계는 갖난 아기때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클 것이다.

놀이터에서 발견한 아이들의 행동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세계의 확장이었다. 나는 너를 받아줄테니 너도 나를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암묵적인 룰인 것이다. 예컨대 어떤 아이가 피아노나 태권도가 하고 싶어 엄마에게 학원에 보내달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자신이 관심을 가지게 된 어떤 일이나 경험을 자신의 세계안으로 끌어들이는 세계의 확장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반대로 마음에 안드는 무언가가 있다면 쳐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자신을 중심에 세운 채 다양한 친구와 관심사를 조금씩 늘려가며 자신의 세계를 키워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그런데 나이가 먹으면 먹을 수록 나의 세계는 단순히 커지는 것을 넘어 단단해지기 시작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이는 경제적 독립이나 결혼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안정이라는 단어에는 더욱 단단한 세계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담긴다. 하지만 단단함을 얻는 대신 잃어버리는 것도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유연성이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처음보는 타인과 쉽게 친구가 되기 어려울 뿐더러, 만난다 한들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처럼 유연하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정말로 어려워지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나도 단단한 껍데기로 둘러싼 경직된 세계이자, 각자가 섬처럼 고립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단단한 갑옷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섬같은 존재 말이다.

하지만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도리어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世界)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알이 참 재미있는 존재이다. 한편으론 단단한 껍데기를 가진 완전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단단한 껍질 안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마치 물과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알의 실체는 연약함이지만 단단한 껍질은 그런 알의 진짜 모습을 감춰 준다.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단단한 세계는 알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살아간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르트르는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껍데기 안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 사귀고 있는 연인이나 배우자는 뭐란 말인가? 사르트르는 확신을 가진 채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너의 세계에 동화시킨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너의 일부분처럼 마치 구성물처럼 자기화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섬처럼 고립된 존재이기에 고독감을 이겨내기 위해 누군가를 끝없이 만나고 다가서려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의 세계와 잘 동화될 수 있는 사람만 만나려고 하는 경향이 보이며,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이라기 보다는 자기화 시킬려고 하는 경향도 엿보인다.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면 그런 연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레타(키라 나이틀리)와 데이브(애범 리바인)는 같이 음악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 연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레타가 데이브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써준 곡이 대박이 나게 되고 이에 데이브는 유명한 스타가 된다.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하고 뉴욕에 집을 얻고 나름 잘나가는 뮤지션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데이브는 음반사 직원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때 둘은 헤어진다. 훗날 더 큰 스타가 된 데이브는 그래미상을 받게 되고, 그때 그는 자신이 평생 꿈꿔왔던 순간이라고 소감을 말한다. 하지만 그레타는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다. 급기야 그녀는 도대체 자신은 누구를 사랑한 것이냐고 반문하기에 이른다. 함께 길 위를 걷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 어긋나버린 것이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오랜 시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만나왔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나는 너를 정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아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실제로 이런 커플들이 있다. 남자는 여자를 꼬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열과 성을 다해 그녀의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들은 결혼을 하게 된다. 마냥 행복하게 잘 살줄 알았던 그들에게 위기는 의외로 금방 찾아왔다. 아이를 낳은 이후 여자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들고 심지어 자살시도까지 하게 된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 중산층 부부였는데 순식간에 가정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버렸을까? 

사실 남자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는 열심히 돈도 벌었고 아파트도 사줬으니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그런데 더이상 뭘 어찌 해달라는 것이냐고. 이젠 자기도 사회 생활하는게 너무 힘들고 지친다고 말한다. 분명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애를 낳고 나서 몸은 회복되지 않고 어느 순간 자신은 온대간대 없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쾌활했던 성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우중충한 아줌마의 모습만 남은 것이다. 이에 그녀는 슬프다. 예전의 남편은 온대 간대 없이 가부장만이 남아있으니 어느 곳에서도 이해받을 수 없다고 느낀 것이다. 둘은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서로 이해받고 싶어하지만 서로를 이해해줄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는 여자를 자기 세계안에 동화시키기를 바랬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에게 동화된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보니 둘다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르트르의 생각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은 고립된 존재이기에 끝없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이상하게 그 관계는 자신에게로 동화시키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끝없이 자신을 위주로 상대방을 나에게 동화시키려 노력할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서로간의 오해가 생겨난다. 함께 하지만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 외로움과 고독함도 발생한다. 어쩌면 사랑하는 두 연인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상대방을 구속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비긴 어게인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이다. 음악하는 자들이 느끼는 불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비슷한 타인의 존재는 위안을 준다. 그 위안은 자신의 고독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마취제이다. 하지만 둘의 신뢰는 이내 깨진다.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고 서로 이해하고 있으며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착각은 음악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의 차이로 나아간다. 남자에겐 누구도 몰랐던 다른 측면이 있었던 것이고 여자는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그레타가 말한다. 내가 알고 있던 데이브는 도대체 누구냐고 말이다. 고독감을 이기기 위해 해왔던 모든 행독은 또 다른 고독으로 자신을 몰아간다. 끝없이 누군가와 같은 길을 걸으며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길을 잃어버린 별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린 어차피 섬과 같은 존재이니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이 고독감에 몸부림치며 살아야 하는 그런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결국, 문제는 관계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사로잡힌 채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로 중요한건 앞으로 다가올 관계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이냐, 바로 여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그레타는 남친과 헤어진 이후 홀로 고통에 몸부림치다 한물간 프로듀서인 댄(마크 러팔로)을 만나게 된다. 댄은 한때 친구 사울과 함께 음악 회사를 차려 큰 성공을 거둔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속되는 실패에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러다 드디어 진짜를 만났다고 생각한 그는 그레타에게 계약을 맺자고 제안하게 되고 함께 사울을 찾아간다. 하지만 사울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데모테잎이나 만들어오라고 퉁명하게 대꾸할 뿐이다. 이에 댄은 데모테잎 만들 돈을 달라고 하지만 그런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말하며 내쫓아버린다.

사실 사울을 보고 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생물도 구축할 수 있고 산업도 나름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음악은 거대한 회사라는 형태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고, 점점 더 단단해진 시스템은 이렇게 말한다. “데모 테잎은 당신이 만들어야죠.” 자 어찌해야 할까? 정말 기가 막힌 보석을 발견했는데 그 보석을 제련할 방법이 없다면? 이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까? 아마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들인다면 꽤나 많은 사람들은 은행으로 달려 갈 것 같다. 어차피 확실하게 성공할 만한 보석이니 은행가서 대출을 내고 그 돈으로 데모를 만들어 사울을 찾아가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거 아닌가. 근데 대출도 이런 식으로 내주진 않을 것이다. 뭔가 담보가 필요한데 “저의 멋드러진 음악이 담보”라고 말하면 돈을 빌려 줄까? 결국 갈 곳은 사채시장 밖에 없을 것 같다. 이게 지독한 현실이다.

이때 그레타와 댄은 완전히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유명 세션맨이 아닌 심심해 죽을 것 같은 뮤지션을 고용하고 스튜디오가 아닌 길거리에서 곧바로 음반을 만드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혁명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일지도 모르겠다. 음악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변화를 줬기 때문이다. 확고하고 견고한 산업으로서의 음악과 관계를 맺을땐 어찌해야 할까? 회사가 원하는대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럴려면 대출받으러 가는게 정답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자신들이 속해 있던 모든 관계의 형태를 뒤엎어버린다. 화려한 스튜디오와 소속사의 지원을 뒤로한 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관계의 헝태 속으로 자신들을 몰아 넣어버린다. 비록 그것이 성공을 불러올지 실패를 불러올지 아무도 알 순 없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관계는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이다.

사실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은 나의 마음이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산업이라는 거대한 껍데기 속에 갇힌 음악과 관계를 맺고자 그 앞에서 “제가 잘할께요.”라고 말하는건 의미가 없다. 사람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실제로 수많은 헤어지기 직전의 연인들은 상대의 발목을 붙잡으며 자기가 바뀌겠다고 앞으로 더 잘하겠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내 마음이나 태도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그런 마음이 들게 한 관계의 망이 그대로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언젠가 힐링캠프를 보니 양현석이 나와 강연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질문하고 답변하는 식이었다. 그중 어느 여대생의 질문이 인상 깊었다. 양현석이 자신의 장점을 찾는게 중요하다고 말하자 그 학생이 물었다. 요즘 대학생은 스펙 쌓기 바빠서 뭔가 새로운 장점을 발굴하기가 어렵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패션 디자이너가 꿈인데 그 꿈을 위해선 최선을 다해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양현석의 대답이 일품이었다. 이러니 한국의 패션회사는 고만고만할 수 밖에 없고 유명한 디자이너나 회사가 탄생할 수 없다고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패션 디자이너와 스펙이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무언가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통해 창조를 해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과 스펙은 하등 상관없어 보인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바라는 것은 꿈을 빙자한 대기업 취업이고 그것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회사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공부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꿈을 위한 것이 아닌 회사와 자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불과하다. 단지 그것을 자신의 꿈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 자본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세계에 구성물이 되고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난 정말 꿈을 꾸는 건지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길 위를 걸으며 견고한 산업의 테두리 안에 속하고 싶은 것인지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견고한 세계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영어 성적과 학벌을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맺기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꿈을 말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뭐가 되고 싶다고 말하진 않는다. 대부분 유명한 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별볼일 없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디자인을 꿈꾸는 이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만든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은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가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서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는게 가능할까? 불가능할 뿐더러 도리어 자신의 꿈에 증오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현실 앞에서 말이다. 

사실 대다수의 성공한 유명인은 스스로 길을 만든 사람이지 남이 만든 길을 걸은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길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관계맺기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남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과 관계를 맺으면 완전히 새로운 길을 창조하게 된다. 반면 기존의 경직된 관계 맺기 방식은 남이 만들어놓은 길을 편히 걷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잠재성을 놓치게 만든다. 갓난 아기가 처음 걷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걸음은 실패의 연속일 수 밖에 없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를 끝없이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의 한걸음 한걸음은 분명한 방향을 가진채 나아가며, 항상 뒤에 발자국을 남기게 된다. 그 흔적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자말자 스스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존재였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란 여러 관계의 흐름 속에서 일시적으로 닻을 내린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단단한 껍질 속에 갇힌 자아는 물과 같이 끝없이 흐를 수 있다. 하지만 닻을 내려버린 기간이 너무 길어진 사람은 그런 자신을 알지 못한 채 그곳에 영원히 묶여 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남이 보는 나’ 또는 ‘고정화되어 있는 나’만을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흐름 속에 닻을 내려버린 알에 갇힌 나일 뿐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말한다. 알에서 깨어나라고 말이다. 단단한 갑옷 속에 갇혀서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한 새로운 나의 발견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단단한 갑옷을 깨보면 의외로 별거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난 자유롭고 흐를 수 있는 존재로서,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나를 둘러싼 관계의 모습 자체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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