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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와 함께 간다(2008), 파편화된 고통과 결핍에 대해서 본문

영 화/00's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2008), 파편화된 고통과 결핍에 대해서

유쾌한 인문학 2010. 6. 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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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화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트란안 홍 감독이라는 사람 처음 들어봤고 과거작품들 역시 본적 없다.  영화를 보기전에 포털에서 검색을 해보니 비난 일색의 평들이 대부분이었다.  제일 인상 깊은 비난은 '칭찬하는 사람들중에 왜 이영화가 좋은지 아무도 설명못한다'는 말이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바이다.


실제 영화를 보니 중간에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고 영화 끝난뒤에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비난들이 참 인상깊었다.  그럼 이 영화가 그렇게 쓰레기 영화인가?  글쎄..  뭐가됐든 친절한 영화는 아니라는 점과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글 역시 친절하지는 않을거라는 점.  그리고 예수와 성경에 집착해선 죽도 밥도 안된다는거 정도만 미리 언급해두고 싶다.


파편화된 이미지
극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은 파편화된 이미지이다.  파편화된 이미지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바 첫째 클라인(조쉬 하트넷)이 시타오(기무라 타쿠야)의 상처 사진들을 모아놓은채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장면과 둘째 클라인의 현재상황과 과거 연쇄살인범과 있었던 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교차편집.  셋째는 연쇄살인마가 만들어놓은 예술작품이다.  이러한 파편화된 이미지는 원억압 또는 근원적 분열을 의미하며 이러한 분열은 고통을 통해 발현된다.  사실 분열 그 자체가 이미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는바 이는 인간자아의 형성기부터 발생하는 근원적 소외에 기인한다.  

자아와 주체는 엄격히 구별해야하는바 자아의 형성은 스스로 형성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자에 의해 반영된 형태를 보이게 된다.  결국 자아는 그 발생부터 타자에 의해 소외될 수 밖에 없으며 이렇게 형성한 자아는 다른 것의 매개된 욕망에 다름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아와 자신의 이중적 분열이다.  바로 이것이 극중에서는 파편화된 이미지로서 나타나게 된다.




클라인(조쉬 하트넷)과 연쇄살인마의 예술작품 그리고 편집상의 장치
스샷을 구하지 못해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극중 내용상 연쇄살인마는 사람을 산채로 죽인 후 그 몸으로 아주 기가막힌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아주 기괴한 모습을 띄게 된다.  영화를 보신분들은 그걸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연쇄살인마의 그 작품이라는게 자세히 뜯어보면 배에다가 입을 갖다붙여서 입 큰 괴물의 형상을 만든다던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모습을 조각내서 배열한다던지 등의 모습을 보여주는바 이 작품들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조각난 신체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자아 형성 이전의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 경험은 파편화된 신체의 경험.  팔다리를 가지고는 있지만 내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거울을 보고 있으면 왠지 거울속의 '나'가 귀신처럼 목을 한바퀴 휙 돌릴것 같은 그런 느낌을 형성하게 된다.

결국 연쇄살인마의 작품은 타자의 욕망의 매개로서의 자아형성과 그로 인한 소외가 발생하기 이전의 상황을 지향함으로써, 인간이 자아형성 이후에 느낄 수 밖에 없는 소외로 인한 결핍의 부재상황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연쇄살인마는 인간의 고통은 실로 아름다운것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결핍의 부재상황.  즉 결핍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근원성으로의 회귀.  그건 자연스럽게 고통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라인은 그 연쇄살인범과의 기억으로 인해 상당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극중에서도 밑도 끝도 없이 과거 회상신이 튀어나와 상당히 난잡한 느낌을 주게 된다.  사실 이러한 편집상의 장치는 "ㅁㅁXㅁㅁㅁXㅁX"  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되는바 이러한 불규칙적인 배열은 근원적 분열의 난데 없는 분출을 의미하며, 이는 연쇄살인마의 예술작품이 보여주는 상징성과 동등성을 가지게 된다.  정말 인상 깊은 장면은 위의 스샷에서 보여지듯 클라인이 시타오(기무라 타쿠야)의 상처사진들을 나열한채 어떤 형태를 이루는 모습이다.  이 장면은 사실 사진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뿐 연쇄살인범의 행위와 크게 다를바가 없는 행동이다.  




수동포(이병헌)와 릴리
개인적으로 수동포는 참 아쉬움이 많이 드는 캐릭터라고나 할까?  조쉬 하트넷이 연기한 클라인과 비교했을때 영화구조상 같은 위치에 서있지만 뭔가 부족함이 드는 인물이다.  캐릭터의 비중이나 무게감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고 상징적 부족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다.  수동포는 클라인과 같은선에 서있지만 클라인의 연장선으로서의 개념이다.  수동포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인물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릴리와 관련해선 정말 모든걸 다 걸어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수동포라는 인물을 피도 눈물도 없는 범죄조직의 두목으로 설정한 것은 느와르적 성격을 영화에 부여하기 위해라기보다는 법 밖에 서있는 자로서의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수동포가 보이는 릴리에 대한 집착은 일종의 최초의 이자(二者)구조에 대한 집착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현실로의 나아감을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자면 자아의 형성과정에선 소외도 발생하지만 동시에 매료도 발생하게 된다.  타자의 욕망의 매개에 의한 자아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일 처음 만나는 타인의 욕망의 매료와 집착은 놀라울 정도이다. 

타인의 욕망에 의해 매개된 자아는 그것이 스스로 구성한 것이 아니기에 환영의 이미지에 근거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자아의 주된 기능은 이러한 처음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완전한 이미지를 자신이라 착각하게 만들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이미지에 대한 매료가 바로 나르시즘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법이라는 상징적 기표에 의해서 상실될 수 밖에 없고 최초로 다가온 타자의 욕망에 기대어 항상 환영의 이미지속에서 살아갈 수도 없다.  즉 현실로 나아가야한다는 말이다.  이때부터 인간의 어떤 결핍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수동포 역시 이러한 결핍을 릴리를 통해 되찾으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범죄두목으로서의 수동포의 위치.  즉 이러한 법 밖에 서있는 그의 좌표가 현실상징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의 거부는 결국 최초의 이자적 구조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감정은 크게 두가지.  원초적 증오와 원초적 사랑의 감정뿐이다.  이러한 원초적 증오와 사랑의 감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바로 수동포인 것이다.




The Rain
제목에 담긴 비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으려고 별에 별 상상을 다하던데 사실 어려울거 하나 없는 문제이다.  시타오(기무라 타쿠야)가 필리핀에서 총에 맞고 사망한후 다시 살아나 자신이 버려진 동굴 밖으로 나왔을때 비가 내렸었다.  거기서 내린 비때문에 제목에 the rain이 붙은 것이다.  결국 그 장면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때부터 시타오가 그런 이상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뭐 원래 가지고 있던걸 깨달았다고 볼 수도 있을려나?  뭐가됐든 그날부터이다.  결국 비는 시타오를 직접적으로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시타오는 어떤 인물인가?  극중에서는 대놓고 예수의 재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행하는 기적은 타인이 입은 상처나 병을 낫게한후 그것을 자신에게 가져와 자신의 몸에서 치유하는 방식이다.  극중에서 시타오를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주류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들을 묶어낼 수있는 하나의 단어는 빈민.  빈민은 결핍의 극대화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느끼는 최초의 파편화된 경험의 근원적 균열은 결핍을 불러오며 이는 필연적으로 보충을 욕망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결핍의 최초의 보충은 바로 인간이 처음 만나는 타자의 욕망의 매개로서 채워지게 된다. 

사실 최초의 타자는 이미 현실구조속에서 살아가는 자이므로 이자구조의 욕망만을 가지고 있는자는 아니다.  결국 인간은 최초의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때부터 다자구조의 현실구조속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사회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결국 욕망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맞닥들이게 되는 결핍의 보충이라 할 수 있다.  극중에서 이러한 결핍은 다양한 형태의 신체적 고통으로 표현되는바 시타오는 바로 이러한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마무리
뭐 길게 길게 썼지만 결국 한줄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대단히 좋은 작품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또 한편으로 대중의 엄청난 비난을 보고 있자면 역시 괴리감이 크구나 라는 생각도 많이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은 좋은 작품이니 반드시 이해하라"  뭐 이따위로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각자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면 되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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