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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스라이프(1998), 아래에서 올려다본 세상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벅스라이프(1998), 아래에서 올려다본 세상

유쾌한 인문학 2010. 1. 12.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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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스라이프(A Bug's Life)
1995년 토이스토리를 대 성공으로 이끈 픽사는 후속작을 계획하게 된다.  토이스토리로 아카데미에서 존 래스터 감독은 상을 받기도 하지만 픽사 자체적으로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픽사는 3D애니메이션의 역사와 그 궤를 가치하는 회사이지만 당시에는 작은 회사에 불과했기에 배급은 디즈니가 맡게 된다.  결국 토이스토리로 인한 수입은 디즈니가 대부분 가져가게 되고 이지점에서 회사의 위기가 닥쳐오게 되는 것이다.  결국 픽사는 주식공개를 결정하고 그로인해 스티브 잡스는 초기 투자액의 10배가까운 돈을 거둬들이게 된다.  그리고 픽사는 디즈니와 동등한 관계로 다시 재계약을 맺게 된다.  

이후 픽사는 2번째 작품을 계획하게 되고 그 작품이 바로 벅스라이프이다.  감독은 여전히 존 래스터 감독이 맡게 된다.   벅스 라이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최초의 와이드 스크린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그외에도 개미를 수백마리를 동시에 표현해내는 기술력은 당시에는 듣도보도 못한 기술력으로서 사실상 벅스라이프를 통해 애니메이션의 또다른 장이 열리게 된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세상 앞선 토이스토리는 눈감으면 벌어지는 존재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을 상상하여 만들었다.  하지만 벅스라이프는 존재하지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바로 곤충의 세계이다.  곤충의 세계라는 것은 인간과는 달리 아주 작은 존재이다.  그 작은 존재가 땅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인간과는 분명 시야가 다를 것이다.  이를 인간이 이해하고 벅스라이프를 제작하기 위해 픽사는 초소형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하여 그들의 마당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정원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한채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식으로 관찰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바로 이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곤충의 입장에서 이 세상은 어떠할까?  비가오면 그들에게 있어 그 비는 어떤 존재일까?  그들에게 중력이라는 것은 어느정도로 작용할 것인지.  작은 개울은 그들에게 어떠한 것으로 다가오게 될까.  결국 같은 지구상에서 살고 있지만 인간과 곤충이 바라보는 세계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개미가 하나의 사과를 보고 있다고 했을때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같은 공간이지만 살아가는 세상은 다르니 말이다.  그럼 인간이 바라보는 사과만이 유의미한 사과가 되는 것이고 개미가 바라보는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과가 되는 것일까?  난 여기서 형이상학 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시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이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부분 인간의 시선에 머물게 되는것이 현실이고 인간중심적 사고관에서 한치도 벗어나기가 힘들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는 지각만을 절대적인것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이 가지는 지각은 인간이 가지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의 입력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신호를 뇌가 해석해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입력기관이 다르다면 해석하는 방법도 달라질테고 입력기관이 같더라도 해석기관이 다르다면 역시 다르게 해석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으로 인해 곤충이 바라보는 세상과 인간이 바라보는 세상은 달라지게 된다.  결국 인간이 가지는 자신의 지각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은 우월한 상위계층으로서 가지는 하나의 폭력에 불과한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곤충의 작은 세상에서도 각 곤충마다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부분이다.  그리고 인간이던 곤충이던 최상위의 시선과 최하위의 다양성이 가지는 관계의 매커니즘은 최상위가 만들어낸 시선을 최하위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억압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지점이 아닐련지. 


메뚜기와 개미의 교훈
이 영화의 내용은 대단히 간단하다.  수백마리의 개미들이 단 몇마리의 메뚜기들에게 항상 협박당해 매년마다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다.  메뚜기는 개미 한마리 한마리를 붙잡고 협박하여 그들에게서 공물을 받아내는 형국이다.  결국 주인공 개미가 외부로 나가 메뚜기를 물리칠 용사를 데려오게 되는데 알고보니 서커스 곤충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메뚜기를 개미들이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사실 개미들이 숫적으로 자신들이 월등히 우세하지만 메뚜기에 맞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메뚜기에게 잡혀 죽을 개미가 혹시라도 자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때문이다.  결국 개미들은 스스로의 시각을 개별적이고 협소하게 바라보았기에 더 크게는 자신들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개미들은 바보라서 자신들의 시각을 협소하게 잡았을까?  아니다.  그건 메뚜기들이 공포로서 그렇게 강요했기에 개미들 스스로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는것이 정답이다.  결국 위에서 아래로 내려누르는 권력에 개미들 스스로가 굴복하고 이게 적응하고 이러한 것을 스스로 확대재생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나라를 이루고 있는 절대 다수의 서민계층의 사람들.  이들은 분명 다수이고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위에서 내려오는 권력에 스스로 굴복하고 그 권력의 논리에 충실하지 않았던가.  난 무슨 혁명을 하자 그런말이 아니다.  최소한 비정규직이 50프로를 넘어서는 이런 엿같은 상황은 충분히 스스로의 힘으로 피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극중으로 돌아가보자면 마지막에 결국 개미들은 스스로의 힘을 깨닫고 메뚜기에 맞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지배담론의 변화라고 볼 수 있으며 지질학에 비유해보자면 지층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지층이 다른 지층으로 바뀌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 지층이 쌓여온 수천 수만년의 세월을 지배하는 담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니깐.  결국 개미들은 그것을 해낸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단하나의 담론을 말해보라면 신자유주의를 말할 수 있을것이다.  이 경제이론에서 다양한 소담론들이 도출되어 거대한 관계의 구조를 이루어 이 사회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담론들이 가지는 권력의 확대재상산에 열과 성을 다하는 꼴이다.   물론 가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면 그게 즉각 반응해서 약간의 액션을 취하기도 하지만 역시 지속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딱 그순간일뿐이며 다시 다들 신자유주의 논리의 확산에 열과 성을 다해 충성을 다하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을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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