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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따뚜이(2007), 누구든 원하는걸 꿈꿀 수 있는 세상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라따뚜이(2007), 누구든 원하는걸 꿈꿀 수 있는 세상

유쾌한 인문학 2010. 1. 21.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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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따뚜이(Ratatouille)
픽사가 내놓은 8번째 작품으로 2007년도에 발표되었다.  감독은 인크레더블을 제작한 브래드 버드로서 외부인사였던 브래드 버드가 다시금 돌아와 만든 작품이다.  픽사의 만화가 재미있고 신비로운 이유로 흔히 그들이 매년 보여주는 놀라운 기술력을 대곤한다.  하지만 픽사의 만화가 재미있는건 기술이 주된원인이기보다는 그들이 개발해내는 캐릭터와 이야기 소재의 참신함이 더 큰이유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이라는 것은 결국 예술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하나의 툴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할뿐 기술 그 자체가 예술이 가지는 본연을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일 처음 만들어낸 캐릭터는 다들 아시다시피 장난감이다.  그뒤 곤충으로 이어지고 그외 몬스터, 물고기 등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이다 급기야 쥐까지 나오게 되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쥐가 하는 일인바 라따뚜이의 주인공인 쥐는 바로 요리사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상상력의 주인공은 브래드 버드이다.  

요리라고 하는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때 맞닥들이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맛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런 뭐 영화에서도 문학과 같이 맛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픽사는 이를 정면돌파하여 맛을 시각화하는 것에 도전하게 되고 그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톡톡튀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낸다.  



쥐와 요리
라따뚜이를 만듬에 있어서 쥐라는 캐릭터를 먼저 생각했을까?  아님 요리라는 내용을 먼저 생각했을까?  사실 뭐 그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들은바없지만 잘 생각해보면 왠지 요리가 먼저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요리라고 하는 주제를 먼저 설정하고 요리사 역할로 요리와 가장 안어울리는 아니 안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요리의 세계에서는 혐오 생물체인 쥐라는 캐릭터를 일부러 선택한 것이다.  

왜일까?  그 이유야 뻔한거 아니겠는가.  극중 위대한 요리사로 등장하는 쿠스코의 모토인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다'는 모토를 실현하기 위해서 쥐보다 더 적합한 캐릭터가 어디에 있을까?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이 가지는 대상을 인간에서 동물로 확장시키는 상상력.  바로 그곳에서 위대한 요리사 쥐인 레미가 탄생한 것이다. 



레미와 랭귀니
극중으로 돌아가보면 레미와 랭귀니의 관계가 아주 오묘하다.  레미는 주인공인 쥐이고 랭귀니는 레미와 함께 파트너쉽을 이루는 인간이다.  레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랭귀니가 소중한존재이고 랭귀니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닥친 대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레미가 필요해진다. 

처음엔 각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이유로 서로 파트너쉽을 이루지만 랭귀니는 자신에게 닥쳐온 성공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이룬것마냥 한껏 들뜬 마음에 휩싸이게 된다.  레미는 레미나름대로 자신의 실력을 만인에게 보여주고 인간들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나 할까?  
결국 이런 애매한 관계는 둘의 다툼으로 인해 끝장날 위기에 처해지지만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랭귀니는 평론가에게 레미를 소개시켜 줌으로써 랭귀니는 자신의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레미 역시 평론가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나름의 꿈을 이루고 그 평론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게 된다.

이둘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파트너쉽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어떠한 경우에든 일방의 희생에 의한 파트너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다른 두인격체의 만남을 통한 상승효과가 파트너쉽의 주목적이니 말이다.  이러한 파트너쉽은 더 멀리는 어떤 단체간 또는 사회계급간에서도 형성될 수 있는 부분이다.  능력있는 레미의 출현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양심있는 랭귀니의 출현 역시 중요한게 아닐련지.  



누구나 원하는걸 꿈꿀 수 있는 세상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자신이 잘하는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게 아닐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설사 자신이 원하는걸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걸 꼭 레미처럼 잘할 수 있을거라는 보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성공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올라갈테지만.  그런데 잘할 수 있던 없던 간에 자신이 원하는 걸 알게 되는 큰 행복을 누리는 것에는 성공하였지만 그걸 할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  극중에선 그게 바로 레미이다.  쥐가 요리를 한다는 것은 너무 비위생적이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의 우리의 흔한 통념이니 말이다.  

원하는게 있지만 할 수 없는 상황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자신의 주변에는 엄청난 부유층만 살고 있다는 분들은 본적 없겠지만.  이런 현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사회의 빈곤계층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더 심화된다.  빈곤계층에서는 하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재능을 보이더라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니깐. 
결국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의해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한정된다는 것이다.  꼭 이런말을 하면 극소수 몇몇의 예를 들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이룬자 많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곤한데 글쎄..  이것이야 말로 1퍼센트의 예를 통해 99퍼센트의 일반을 놓치는 우가 아닐련지.  이런말을 한다는것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사고관에 얼마나 깊숙이 함몰되어있는가를 잘보여주는 측면이라 판단된다.  

간단히 말해 밑도 끝도 없이 무비판적으로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가 얽혀들어가고 여기에 또 한가지 첨부되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사상으로 인해 한국 특유의 문화가 형성되게 되니 집단을 위해 희생하되 그 책임은 개인의 노력부족이라는 아주 희안한 논리이다.  이른바 한국식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각사상의 장점은 다 내팽겨친채 더러운점만 쏙쏙 받아들이는 희안한 풍토라 할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쩔수가 없다는 식의 초기자본주의적 사고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더불어 살 수 있는 인간적 자본주의의 모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건 어떠할련지.  무엇이 되었든 현재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이런 분위기는 정말 잘못된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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