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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신화적 원형과 이데올로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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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신화적 원형과 이데올로기

유쾌한 인문학 2010. 4. 2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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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상당히 유명한 영화이니 특별한 부연설명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3년간 1년에 한편씩 개봉한 어마어마한 시간대를 자랑하는 영화 거기다 감독판은 그 시간이 거의 4시간에 육박하는 초거대 판타지 대작.  이영화가 가지는 위대함은 무슨 말을 갖다붙여도 표현이 안될정도로 대단한 영화이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책을 찾아보다 바그너의 오페라인 니벨룽겐의 반지와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사실 완전 다른 내용이다.  혹자는 좀 따온거 아니냐? 라고 묻기도 하지만 반지 외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반지의 제왕은 돌킨이 완벽하게 창조해낸 소설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리스 신화라는 것들도 대부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형태를 가진것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실상은 시대별로 나타나는 다양한 판본들을 정리해놓은것에 불과하다.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판본들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신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외 몇개의 단편적 문헌들 여기에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들과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와 일리아스 까지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방대한 그리스 신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게르만 신화 역시 마찬가지 형태를 띄는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게르만 신화는 에다와 사가를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문헌들로 이루어진다.  게르만 신화에서 에다같은 경우는 고(古)에다와 신(新)에다로 나뉘게 된다.  그중 고에다가 서울대출판부에 의해 번역되어 나와있는 상태고 신에다와 사가 같은 경우는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뭐 혹시나 저 책을 구입하려는 분이 계실까 싶어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미리 말하자면 사실 필요는 전혀 없다.  굳이 게르만 신화를 알고 싶으시다면 범우사에서 나온 신화총서의 게르만신화를 참조하시는게 옳지 않을까 판단된다.


두명의 영웅과 영웅신화 그리고 영원회귀
이 작품은 사실 전형적인 영웅신화로서의 형태를 보여주게 된다.  크게 보아 두명의 영웅이 존재하는바 한명은 호빗인 프로도와 또 다른 한명은 곤도르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아라곤이다.  사실 아라곤이 보여주는 양상은 래글런이 제시한 영웅의 유형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다.  래글런이 제시하는 영웅의 22가지 특성중 핵심적인 부분은 왕국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 그리고 은근한 칭송과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비밀.  그리고 대전투에서의 승리와 왕으로서의 회귀로 나타나게 되는바 아라곤이 보여주는 양상은 이러한 것들과 정확히 일치하게 된다. 

흥미로운건 프로도의 존재이다.  서쪽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륙에서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호빗들의 마을에서 살아가던 그는 어쩌다보니 반지원정대의 수장이 된다.  이는 중간계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바깥으로의 던져짐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극중에서는 곤도르나 로한의 사람들은 호빗들의 마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가 없는듯한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바 이러한 가장 내밀한 것의 바깥으로의 도출은 중간계 서쪽 사람들이 살아가는 전체적인 경계의 무너짐을 보여주게 된다.  즉 경계에 존재하던 곤도르의 위기와 사우론의 대군대의 출정이 암시하는 중간계 전체의 멸망이라는 상황을 직면하면서 전체의 구조가 혼란 및 어떤 뒤섞임을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장 약해보이는 가장 내밀한 곳에 존재하던 프로도가 하나의 영웅으로서 튀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라곤과 프로도는 똑같이 일련의 제의의 양식을 보여주게 된다.  특히 프로도가 보여주는 모험의 양상은 신화적 모험의 표준으로써 분리-입문-회귀의 과정을 정확히 밟아나가게 된다.  즉 프로도가 가지고 있던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던져지면서 경이적인 경험을 끊임없이 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위기를 겪은 이후 그는 모든 것을 해결해버리는 결정적인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회귀하게 된다.  아라곤이 보여주는 모험의 양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기존의 왕국에서 이미 분리된 상태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점차 왕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며 두개의 대전투를 이끌게 되고 마지막에는 왕국으로 회귀하게 된다. 

여기서 아라곤과 프로도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게 이 둘의 관계의 측면이다.  일단 먼저 둘이 살아가던 공간을 살펴보자.  둘은 서쪽 사람들로서 이영화에서는 선의 측면 또는 정상의 측면에 서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둘이 살아가는 공간은 매우 다른바 프로도는 정말 평화롭고 아늑한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아라곤은 외곽지역에서 순찰을 돌면서 살아가게 된다.  즉 거친 경계와 포근한 내면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극단적인 대비성으로서의 공간으로 징표되는 두명의 영웅을 제시하는 이유는 서쪽 세계 전체의 멸망과 영웅을 통한 회생이라는 영원회귀적 측면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가장 내밀한 곳과 가장 외곽을 상징하는 두 인물을 동시에 내보임으로써 세계 전체가 직면한 멸망을 정확히 보여주게 된다.  만약 프로도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전쟁은 철저하게 외곽의 전쟁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는 영원회귀라는 측면을 상실하게 된다.  무슨말인고 하니 신화적 원형 상징의 주된 특징은 순환적인 속성을 보여주게 되는바 모든 것은 파괴되고 다시 재탄생하게 되는 일련의 순환적인 양상이 원형상징에서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건 멸망이라는 부분이고 이러한 멸망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서쪽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위기를 고취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모든 전쟁은 다 외곽에서 벌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프로도의 꿈을 보여주게 된다.  1편인 반지원정대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프로도의 꿈의 내용은 자신이 살아가던 샤이아가 멸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꿈은 서쪽세계 전체가 직면한 멸망으로서의 징조이며 그렇기에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프로도가 튀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프로도의 존재 자체가 서쪽세계의 멸망으로서의 징조를 그대로 상징하게 된다.  그리고 프로도와 아라곤이 일련의 제의적 행위들을 통해 다시금 세계는 재창조된다. 


반지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에 서는 물건은 바로 반지이다.  이 작품에서 반지는 아주 다의성을 가지면서 반지의 제왕 세계 전체를 축소시켜 압축하여 내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반지를 끼면 엄청난 권력을 가지게 된다고 흔히 알려져있게 된다.  그렇기에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프로도의 길을 끊임없이 막는 것은 누구보다도 인간들 그 자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반지를 가진다고 해서 엄청난 권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지는 끊임없이 사우론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고 그렇기에 반지를 차지한 사람들은 점차 이상한 성향으로 바뀌어나가게 된다.  그것을 가장 잘보여주는 사람이 원래는 인간이었지만 반지를 통해 괴물이 되어버린 골룸이다.

반지를 갖기 위한 노력과 파괴는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반지를 가지기 위한 노력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최고의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행위는 기존의 권력관계의 파괴와 새로운 권력관계의 재창조를 위한 행위로 볼 수 있게 된다.  사실 반지라고 하는 것은 현재 중간계를 이루고 있는 권력의 두 핵심 즉 사우론과 곤도르 왕국의 중심에 서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지를 다른 인간들이 가지겠다는 행위는 곤도르의 위치에 자신의 왕국을 세운다거나 또는 곤도르 왕국의 재건을 위함으로 볼 수 있으며 반지의 파괴는 기존에 존재하던 대립적 두 권력의 구조에서 벗어나 하나의 완성된 제국으로서의 권력의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반지하면 골룸을 뺄 수 있을까?  골룸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영화에서는 반지를 가진다고 해서 정말로 엄청난 권력을 가지게 된다거나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는 그런 양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지를 가진사람들은 대부분 타락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1편인 반지원정대에서 너무나도 빨리 사망해버리던 곤도르 왕국 섭정의 큰아들 그리고 나중에 만나게 되는 작은아들까지 모두 반지의 유혹에 빠지는 순간 타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 타락의 극한에 서는 사람이 바로 골룸이다.  처음엔 단순한 호빗이었던 그가 반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고 그 반지의 유혹에 빠져 살인을 저지른채 동굴속으로 들어가 괴물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양상들을 살펴보자면 반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면적 성향의 중심에 선채 억압되고 숨겨져있던 폭력적인 양상을 끄집어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반지의 유혹에 걸린 사람들은 전부다 대단히 폭력적이고 유아기적인 욕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반지라는 것은 대단히 양면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선과 악에서 창조와 파괴, 죽음과 영원 등으로 나타나게 되는 극중의 모든 이분적 양상의 중심에 서면서 반지의 제왕 세계가 가지고 있는 양상들을 압축적으로 가지게 된다. 


사우론과 탑의 눈동자
사우론 역시 대단히 인상깊은 양상을 보여준다.  사우론은 반지를 잃어버리고 과거 싸움에서 패한 뒤 그는 탑위에서 어떤 눈동자와 같은 형태를 취한채 하나의 관념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몸은 없으되 정신만 살아남은 상태라고나 할까.  흥미로운건 그가 '탑' 위에서 '눈동자'의 형태를 취한채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는 탑 위에서 끊임없이 시선을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장면은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에서 나타난다.  프로도가 마지막 대평원을 건너야할 시점에서 사우론의 대군대에 막혀 어찌하지 못할때 아라곤은 얼마 안되는 군대를 이끈채 블랙게이트 앞으로 진군하게 된다.  그때 사우론의 눈동자는 블랙게이트를 바라보게 되고 그 덕분에 프로도는 대평원을 건너는데 성공하게 된다.

즉 사우론의 시선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만을 응시할 수 있을뿐 자신의 시선이 응시하지 않은 곳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프로도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평원을 건너는 그 순간을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우론이 가지는 본질적 한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우론의 시선에 대한 약점을 서쪽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니 서쪽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우론의 군대들 전체가 그런 양상을 보여준다.  항상 탑을 바라보며 그 탑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것 같은 착각속에서 절대적인 복종을 이루게 된다. 

결국 사우론의 탑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파놉티콘 그 자체가 된다.  파놉티콘은 제레미 벤담이 만든 일종의 감옥이다.  둥근형태의 구조물이며 중앙에 탑이 존재한다.  탑에서는 죄수들을 바라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그 탑에 감시자를 볼 수 없게 되어있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파놉티콘이 재미있는 것은 중앙의 탑에 감시자가 없더라도 죄수들은 그들을 볼 수 없기에 스스로 권력에 훈육되어간다는 점이다.  군대, 학교, 병원 등  이런 기관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이러한 제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교육하고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키는 곳인데 비슷한 방식으로 훈육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훈육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사우론의 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두려움을 생각해본다면 탑이 가지는 파놉티콘으로서의 성향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에서 사우론의 탑은 절대적인 두려움의 상징이다.  항상 탑을 바라보며 그 탑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착각하여 수많은 사우론의 군대는 그에게 절대 복종을 하고 수많은 서쪽 사람들은 그의 눈동자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실 사우론은 전체를 볼 수 없는 한정된 시선을 가진 것에 불과한바 결국 모든 복종과 두려움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다름 아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이러한 탑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2편인 두개의 탑에서는 배신자 마법사가 살아가는 곳 역시 탑이고 곤도르 왕국의 수도 역시 거대한 탑과 비슷한 형태의 성의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왕족은 장 꼭대기에 살아가게 되고 말이다.  결국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든 탑과 비슷한 형태의 파놉티콘들이 보여주는 기능은 동일하다.


아브젝트와 이데올로기적 측면
이 작품은 사실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을때 비판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원저자인 톨킨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경험이 반지의 제왕이라는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래도 반지의 제왕 내에서 묘사되는 그 치열한 전투에 대한 묘사는 경험의 산물이 아니고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서 경험보다 더 확실한건 없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이 씌어지던 당시에는 2차대전이 진행중이기도 했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드러나는 중간계라는 세상은 크게 봐서 동서라는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소위말하는 정상적인 인간과 앨프들이 지배하는 문명의 세계로서 거대한 두 왕국과 그외 다양한 나라들이 존재하며 저 먼곳에는 호빗들이 살아간다.  반면 사우론이 지배하는 악의 무리인 동쪽은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비문명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양상이야 당시 유럽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배에 대한 일련의 태도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고 그러한 태도가 작품속에 별 의심없이 그대로 녹아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단순한 선악 대립에 불과하고 백인들이 만든 영화이고 소설이기에 백인 중심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글쎄..  중요한건 이러한 백인중심적 사고관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로서 얼마나 그들이 자기 우월적 태도에 사로잡혀있는가? 라는 점과 그러한 사고관이 극도로 팽배해졌을때 야만의 인간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사고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흔히 '너무나도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한 비판이라고나 할까.  이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영화에서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오직 괴물로만 표현된다.  사우론은 눈알만 달려있는 탑위에 존재하는 이상한 형태로 나타나고 그외 동쪽에서 온 군인들은 온통 희안한 모습들로 표현된다.  특히 코끼리 군대의 그것은 마치 인도인을 연상시킨다고 하면 지나친 오바일까?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야만으로서의 동쪽 군대들은 하나의 아브젝트로서 작용하게 된다.  아브젝트는 우리가 혐오하고 거부하며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것들로서 '나'라는 주체를 형성함에 있어서 사회가 부정적인 것으로 명명한 것들을 추방하여 그것들과의 경계를 형성하게 되고 우리 주변을 끊임없이 배회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브젝트론은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왔을때 대단히 큰 유의미성을 가진다고 생각되는데 중요한건 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또는 지배적 담론이 어떠한 것을 비정상으로 여겨 혐오적이며 거부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자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지배적 담론은 북한 사람들을 도깨비와 부모를 팔아넘겨버리는 비정상적인 사람들로서 아브젝트화 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시한바 있다.  하지만 현재는 그정도까지는 아닌 것이 현실인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서 그 이데올로기가 규정하는 비정상에 대한 지시도 바뀐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동쪽 사람들을 괴물로 표현하고 서쪽 사람들의 주변을 끊임없이 배회하며 괴롭히는 비정상으로 규정한채 그들과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은 위에서 언급한 신화가 가지는 영웅의 의례적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승리하게 되며 그들은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구현하는 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곤도르 왕국에 존재한다.  곤도르는 동쪽 사람들과 바로 접근지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곳에는 왕이 부재하는 상태이다.  왕족은 아시다시피 아라곤이다.  이영화에서 영웅의 존재는 크게 두가지 축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한축이 바로 아라곤이며 아라곤이라는 영웅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왕국으로 회귀하는 양상은 영국이 꿈꾸던 대영제국으로의 회귀 그 자체로서 바라볼 수 있는 측면이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영웅신화와 신화의 영원 회귀적 측면이 결합되고 여기에 추방된 아브젝트로서의 동쪽 사람들을 더하게 되면 이 작품 이면에 숨겨져 있던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나타나게 된다.  추방된 것들이 끊임없이 제국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주체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까지 아니 사실상 파멸을 맛본 상황에서 영웅의 회귀를 통해 다시금 재건되는 주체라는 측면은 영원회귀라는 측면으로 바라봐지는바 이는 당시 영국이 직면한 상황을 정확히 일치시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무리
이상으로 이런 저런 측면을 살펴보았다.  항상 글을 쓸때는 참고 서적이 아주 많이 존재하는데 한번도 이를 적은적이 없었던것 같다.  이왕지사 적시하지 않기 시작한거 끝까지 안하겠다.  사실 난 이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할까.  나로선 그저 최고의 재미를 선사해주는 대서사 영화일뿐.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많이 보았다.  개봉당시에도 편당 기본으로 5번은 반드시 보고 디비디 구입해서 약 20여번을 또 보고 현재는 블루레이를 구입할까 말까를 놓고 망설이는 상황이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왕의 귀환에서 로한의 군대가 미나스 티리스에 도착하여 뿔나팔을 불던 그 장면.  아 정말 다시봐도 감동이요 소름이 쫙 돋는 그런 명장면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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