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바다를 보라(1988), 바다와 거세된 여성성 본문

영 화/프랑스 영화

바다를 보라(1988), 바다와 거세된 여성성

유쾌한 인문학 2010. 9. 28. 11:07
반응형





바다를 보라(Regarde La Mer, See The Sea)
프랑소와 오종.  프랑스 작가주의의 맥을 이어가는 감독이다.  작품이 상당히 많지만 초기작품들은 국내엔 거의 소개도 안되었고 단편 영화가 많은지라 구하기가 힘들다.  '바다를 보라' 이 작품은 사실상 첫번째 중장편 영화로서 50분남짓되는 러닝타임을 가지게 된다.  이미 위의 포스터에서 느끼셨겠지만 정말 독특한 영화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해보자면 관객의 인식에 따라서 영화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자체가 너무 난해하여 못봐주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보면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텍스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인식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런 영화가 상당히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내용을 간단히 언급해보자면 어느 섬에서 나이어린 딸과 엄마가 살고 있다.  남편은 파리로 출장을 간상태이다.  그녀를 보면 뭐랄까 약간의 권태라고 해야 할까?  애기를 키움에 있어서 자존감의 붕괴 같은 것이 살짝 살짝 느껴진다.  물론 이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어느날 한 배낭여행을 하던 여성이 찾아오게 된다.  마당이 넓으니 마당에서 텐트를 치겠다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배낭여행을 하는 여성은 약간 퉁명스러우면서 까칠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둘은 점차 가까워지게 되고 그러던 어느날 그 여자는 집주인을 죽이고 애를 데리고 도망가게 된다. 




바다와 거세된 여성성
일단 먼저 눈에 띄이는 부분은 전체적인 색깔이다.  중심이 되는 곳은 바닷가 근처의 집인데 집은 흰색과 파란색이며 외부인이 가져온 텐트는 빨간색이다.  그와 동시에 눈여겨 볼 부분은 집주인이 배낭족 여인과 첫번째 저녁식사 이후부터 빨간색 옷을 입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색깔이 중요한 이유는 그 자체로서 두 캐릭터를 규정하는 기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괜히 바닷가 근처에서 빨간 텐트를 치고 빨간색 옷을 입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바닷가 근처에서 하얀색 집에서 살며 하얀색 옷을 입던 집주인은 이 두가지 기표로 인해서 안정감을 주게 된다.  불안하지 않은 삶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다 빨간색의 기표를 가진 외부 배낭 여행객 여자가 찾아오게 되고 그때부터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사실 이미 영화의 초반에 집주인이 가지는 어떤 지겨움, 따분함, 자존감의 상실 같은 것이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지속적으로 울어대는 애기 때문에 자신의 생활은 사라지고 출장간 남편은 연락도 안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조금씩 사라진다는 느낌.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둘러쌓여있지만 이미 그녀의 내면은 빨간색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러던 어느날 배낭족 여성이 그녀의 공간으로 침투하게 된다.  처음엔 그냥 마당에 텐트 쳐놓고 자고 가라고 했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게 사실인 것이고 결국 저녁식사에 초대하게 된다.  둘은 그날 저녁 대화를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집주인은 뭔가 자유로워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호감을 느끼며 이때부터 배낭족 여성은 집주인 내면에 들어있는 빨간색을 은근히 조금씩 건들여들어가게 된다.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욕망 같은 것 말이다.  그와 동시에 배낭족 여자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보여주게 되는데 예컨데 집주인 칫솔에다 똥을 묻히는 행위나 변기에서 똥을 안내린채 그냥 냅둬버리는 행동 따위를 보여주게 된다. 

사실 그 장면을 보았을때 상당히 충격받았었는데 한국 영화라면 잘려나갔을 그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게 나와서 약간의 구토감 마저 불러일으키는 그런 장면이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유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드러나게 된다.  둘은 두번째 저녁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아이를 낳았을때 경험을 이야기 하게 된다.  이때 배낭족 여성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용인 즉슨 아이를 낳을때 외음부가 찢어지면서 항문과 연결될 수가 있다.  아이를 낳을때 똥이 나올 수도 있으며 아이를 낳은 이후 찢어진 질로 인해 질을 통해 똥이 나올 수도 있다.  뭐 그런 내용이다. 

이때 그녀는 자신도 한때 아이를 가진적이 있었는데 낙태해버렸다고 말하게 된다.  사실 이 대화를 통해 어렵지 않게 유추되는 것은 그녀는 낙태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것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아이를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가질 수가 없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불임이다.  아마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서 겪은 경험을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배낭족 여성은 심각한 결핍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아이를 욕망하되 가질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불임이라는 부분을 좀 더쉽게 설명보자면 질과 항문이라는 두 생체기관은 알다시피 바로 옆에 붙어있는 형태를 띄게 된다.  특히 질이라는 기관은 생산 기능과 노폐물을 버리는 기능 두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그 자체로서 양가적 기표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질이 찢어져 바로 옆에 있는 항문과 연결되어 순수하게 노폐물을 버리는 기능만 하는 항문의 기능이 질로 넘어왔다는 것은 생산기능의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상실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기능의 상실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실은 자신의 자존을 똥으로 치환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 똥을 집주인 칫솔에 묻히는 장면은 자신의 상실을 집주인에게 전가하겠다는 하나의 상당히 어려운 복선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집주인은 그녀를 집안에서 자라고 권하게 되고 그날 밤 배낭족 여자는 집주인을 죽이고 아이를 데리고 떠나게 된다.  배낭족 여성을 집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결국 하얀색 집안에 빨간색 여자를 들이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상황 자체가 하나의 기표로서 작용하게 되는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째는 집주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성의 확인, 둘째는 배낭족 여성이 꿈꾸는 안과 바깥의 역전이다.  즉 빨간색은 한편으론 집주인의 욕망이면서 또 한편으론 배낭족 여성의 상실이다.  이 두가지 욕망은 다른듯하지만 결국 같다.  그렇기에 배낭족 여성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욕망의 확인이 되는 것이고 배낭족 여성의 입장에서는 상실을 바깥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날 밤 집주인 여자가 죽은 장소 역시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다.  그녀를 죽인채 빨간색 텐트안에 버리게 되는데 바로 이순간 위에서 언급한 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즉 하얀색이던 집주인을 죽여버림으로서 배낭족 여성이 가지고 있던 상실을 집주인에게 전가하고, 상실의 주된 원인인 자궁 그 자체를 상징하는 텐트안에다가 시체를 버림으로 상실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애기를 데리고 도망가는 것이다. 




마무리
괜찮은 영화이다.  꼭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오종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데 나의 취향과 그의 작품세계는 분명 별개의 문제인 것이고 그의 작품세계는 정말 놀랍고 대단하다.  가장 인상 깊은건 오종감독은 남자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양반의 영화세계는 거의 대부분 여성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여자 마음을 잘 이해하는 남자 뭐 그런걸까나?  아무튼 이런 영화는 꼭 봐주시는게 좋다.  이런걸 모르고 살아도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결국 빵만 먹고 사는건 정말 비극인 것이다.  꼭 밥도 먹으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