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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트콤(1998), 당신의 가정은 안녕하십니까? 본문

영 화/프랑스 영화

영화 시트콤(1998), 당신의 가정은 안녕하십니까?

유쾌한 인문학 2010. 9. 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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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2번째 중장편 영화이다.  사실 두번째라고 하긴했지만 '바다를 보라'와 같은 해에 나온 영화로 선후관계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쨌든 아주 독특한 가족 영화이다.  형식은 시트콤 비슷하게 만들어져있고 코미디물인데 그 내용이 아주 엽기적이다.  이 작품 역시 대충보면 어처구니 없는 엽기 영화 정도로 치부될 수 있는 작품이지만 몇꺼풀 벗겨내면 상당한 수작임을 알 수 있다.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입장에서 98년도는 자신의 중장편 영화가 처음으로 시도된 해라고 볼 수 있는데 두작품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작들이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땐 도저히 심정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런 개막장이 정말로 가능한가?  뭐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삶 자체가 이미 저런 개막장이 아니던가?  뭐 그런 생각도 조금 들고 뭐가 됐던 프랑스의 가정이나 한국의 가정이나 딱히 다를건 없다는 결론이다.  이게 확실하게 와닿았던건 미즈넷이라는 사이트를 통해서였다.  멋도 모르고 들어간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내려지는 결론이 한가지 있었다. 

일단 그 이야기들은 일상의 부분이 활자화되어 제시되니 약간의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거리감이 생기기에 남얘기처럼 느껴지고 그러니 그것에 같이 분노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조그만 생각해보면 남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수 있다.  즉 우리의 일상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들이 담겨진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상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고 대충 넘기기때문에 인식하지 못할뿐이다.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채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거리가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흥미를 가지고 볼 수 있으면서 같이 분노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측면을 살짝 비틀어보게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  그 일상을 몇가지로 분리시키고 그렇게 분리된 각각의 것들의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게 된다.  물런 그것들의 표현 방법은 철저하게 성적인 방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문제는 그 수위가 상당하고 엽기적이라 한국사람의 입장에선 엽기 코믹 드라마 정도로 보일 수 있겠다는 점이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아들, 딸, 엄마, 아버지가 살아가는 전형적인 중산층 4인 가족이 배경이 된다.  부가적인 인물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흑인 여성이 한명과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흑인 남성 그리고 딸의 남자친구 정도가 등장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쥐를 한마리 사가지고 오게 된다.  문제는 그 쥐와 접촉하는 가족들이 전부 갑자기 놀라운 행동을 보인다는 점이다.  일단 첫째로 아들이 쥐를 만지면서 교감하게 되자 갑자기 식사자리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해버리고 그 이후부터 자신의 치장에 열을 올리게 된다.  딸 역시 그 쥐를 만지고 교감하게 되고 급기야 쥐와 애무하는 듯한 행위까지 하면서 자신의 남친을 멀리하게 되고 갑자기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쥐를 싫어하던 어머니도 어느날 쥐를 만지게 되는데 그녀 역시 갑자기 변해 아들과 근친을 맺게 된다.  가족 구성원이 점차 막장으로 치닫게 되자 어머니는 단체로 상담을 받길 원하는데 아버지는 거부한다.  치료를 받으러 떠난사이 어머니는 쥐가 문제임을 깨닫게 되고 전화를 해서 쥐를 없애라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쥐를 없애려고 만지다가 또 교감하게 되고 급기야 그 쥐를 요리해서 먹게 되는데 쥐를 먹은 이후 아버지는 초거대쥐로 변해버리게 된다.  나머지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니 쥐로 변한 아버지를 대면하게 되고 이에 쥐를 제거하게 된다. 




당신의 가정은 안녕하십니까?
일단 등장인물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가족구성원은 전원 백인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등장하는 인물로서 아들과 동성애적 관계를 맺게되는 흑인이 한명 등장하고 파출부와 딸의 남자친구는 라틴쪽 사람으로 보이는데 아마 이베리아쪽이 아닐까 판단된다.  이렇게 다양하된 분류위에 성적 기호가 얹어지게 된다.  크게봐서는 동성애와 이성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뚜렷하게 구별되진 않는다.  그냥 무작위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이렇듯 등장인물을 다양화시킨뒤 쥐와 만나게 하면서 그들이 어떠한 욕망을 표출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일단 문제가 되는 쥐를 가지고 온 아버지는 정말 철저하게 방관자적인 입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점점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전형적인 군림하는 아버지이자 무관심한 아버지로서 권위만을 은연중에 내세울뿐이다.  자녀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 없고 딸이 자살을 시도한 것에도 관심없다.  아들이 대화를 시도하면 역시 무덤덤하게 FM적인 이야기만 해줄뿐이다.  많이 겉돈다는 느낌일까나?  이러한 아버지와 쥐의 관계가 상당히 유의미한데, 쥐를 만진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망에 급작스럽게 솔직해지는 양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쥐 자체가 아버지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의 반대적 측면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쥐를 만지게 되면 전부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변해가게 된다.  뭔가 욕망 자체가 정적인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바뀐다는 느낌이랄까?  일단 아들부터 살펴보자면 초반에는 대단히 수동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랬던 그가 갑작스럽게 커밍아웃을 하더니 옷을 수집하고 스타일도 점점 세련되게 변해간다.  쥐를 만지기 이전에는 정적인 아버지에게 억눌렸다면 정적인 아버지의 반대측면인 쥐와의 교감을 통해 그 역시 정반대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딸은 어떠한가?  딸의 욕망은 의외로 간단하게 도출된다.  즉 부모들이 아들에게 지나치게 관심과 사랑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딸이 그렇게 남자친구와 성적인 에너지를 부모앞에서 표출해댄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쥐를 만진 이후 변하게 되고 자살을 기도하고 하반신에 부상을 입어 휠체어 신세가 된다.  그뒤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은 남자친구와는 약간의 거리를 둔채 가족에게 뭔가 관심을 끌려는듯한 양상을 보여준다. 

극중 어머니는 더욱 충격적이다.  무덤덤한 남편과 점점 망가진다고 생각되는 자식들 앞에서 걱정만 늘어가다 그녀 역시 쥐를 만지고 교감을 하게 되는데 그때 그녀는 아들과 성관계를 맺게 된다.  즉 근친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 부부사이에 존재하던 심각한 성적 불만족과 관계에 대한 불만족이 드러나게 된다.  중요한건 근친 자체를 바라보며 비난해댈게 아니라 그 상황이 가지고 있는 기의를 정확히 표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껍데기에만 집착하는 것은 대단히 유아적이다.

아버지는 무관심한듯하지만 가족들이 이런식으로 변해가자 마음에 들리가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모든 가족 구성원을 총으로 쏴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러다 극의 마지막에 쥐를 요리해 먹게 되고 그때 그는 쥐로 변신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아버지 나름의 쥐와의 교감을 통해 자신의 반대적 측면인 쥐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미있는건 그렇게 드러난 욕망은 대단히 추악하다는 점이다.  초거대 쥐로 등장하니 말이다.  결국 드러난 욕망으로서의 아버지는 추출당하게 된다.  사실상 이부분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숨겨진 아버지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었는지 말이다.




마무리
우리집은 너무 햄볶아요.  우리집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가끔 이런 사람이 있는데 웃기는 소리..   당신집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을 직시하지 못한것일 뿐이다.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추악한 인간 집단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가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단내에서 욕망을 발산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 당신집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 집이 하나의 질서에 의해서 완벽하게 제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제어된 질서는 반드시 억압을 가져오게 된다.  억압은 욕망에게 작용하고 말이다.  이렇듯 완벽해 보이는 것의 이면에는 오만가지 욕망들이 꿈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를 지속적으로 억압한다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말을 복잡하게 적어놔서 그렇지 이건 대부분의 가정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내말 틀렸나?  당신집에서 허구헌날 자녀들과 피터지는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는 자녀들의 욕망을 하나의 질서로 제어하려하기 때문 아닌가?  당신집에서 허구헌날 배우자와 피터지게 싸우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은 결국 개별적 개체성을 가지게 된다.  즉 인간은 개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서는 살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만 또 한편으론 순수한 집단으로서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는 기막힌 아이러니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별성과 집단성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 측면은 의존적이면서 긴장감이 넘치는 관계이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측면이 상당하다.  이는 비단 개별적 인간 뿐만 아니라 더 큰 틀에서 사회, 역사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집단성과 개별성의 어떤 순환적 관계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측면을 오종감독은 정확히 포착하여 엽기 코미디 영화로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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