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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경계로 보는 변증법과 한국전쟁 본문
계몽사상
어떤 사상이던 그 시대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즉 사상은 시대의 아들이 된다. 18~19세기는 계몽과 낭만의 시대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측면은 독일에서 약간 독특한 형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계몽이란 비이성적인 것의 배제를 말한다. 즉 미신이나 종교 그외 비합리적인 이해할 수 없는 관습따위의 배제를 뜻한다. 당시 독일은 주변 국가인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낙후되고 봉건적인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도이치 사람들은 거대한 도이치 국가라는 것을 가진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즉 사회 전반이 이성 중심이 아닌 비합리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칸트나 헤겔 역시 이러한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신봉하고 그에 따른 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결국 도이치도 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도이치는 뭔가 구심점이 되는 나라도 없고 같은 말 쓴다는거 말고는 딱히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인지라 이성 중심의 계몽과 동시에 다른 방향의 사상도 함께 드러나게 되는바, 즉 18세기 즈음의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토대가 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문학의 영향에서 맞서기 위해 도이치적인 것을 찾는 것에 주력하게 된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계몽주의가 아직 뿌리도 못내린 도이치 전통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한다. 결국 계몽이념을 통한 시민계급 형성 이전에 소국들로 쪼개져있는 시민들의 계급적 유대를 위한 민족적 토대를 먼저 구축하려 시도하게 된다. 이것이 도이치 낭만의 기본적 토대이다.
헤겔
헤겔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변증법적 사고관이다. 그의 철학을 절대적 관념론이라 칭하기도 하고 변증법적 관념론이라 칭하기도 한다. 흔히 정-반-합이라는 식으로 널리 알려진 변증법의 용어는 살리베우스라는 학자의 헤겔 주해서에서 등장하는 말로서 이는 헤겔이 규정한 용어는 아니지만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관은 헤겔 철학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즉 변증법이라는 관점 하에서 거대한 철학 체계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사실 변증론이란 헤겔만이 사용한 사유방식은 아니다. 플라톤에서 칸트의 변증론, 피히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아주 넓은 범위에서 행해지는 사유방식이다.
가장 중요한 저서는 정신현상학일 것이다. 아주 어렵고 난해한 책으로 유명한데 이는 인간의 인식에 대해 논하는 인식론에 관한 책이다. 감각적 확신에서부터 시작하여 의식과 자기 의식, 이성, 정신, 종교를 거쳐 절대지로 나아가는 어마어마한 변증법적 체계이다. 가장 단순한 감각적 확신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인식은 실패와 좌절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그다음으로 그다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끊임 없이 의식은 경계를 긋고 실패하고 그 너머로 나아간 후 다시 경계를 긋고 또 실패하는 그 끝에 무경계인 절대지가 완성된다. 여기에서 의식과 대상, 인식과 존재, 주체와 실체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알게 된다. 법철학은 이러한 변증법 사고관을 사회발전 과정에 적용한 것으로 강제적인 법이 지배하는 단계에서 도덕이 지배하는 단계를 거쳐 이 두가지가 종합된 인륜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인륜의 단계는 가족과 시민사회 형태를 거쳐 개별성과 공동체성이 통합된 국가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제논과 헤라클레이토스
변증법은 운동과 변화라는 것을 핵심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사물이 가지는 존재 방식으로서의 운동과 변화는 그리스 시절부터 이어져온 오래된 주제이다. 엘레아 학파의 일원인 제논은 현상을 보자면 사물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실질은 정지와 불변이라고 말한다. 즉 존재하는 것은 정지와 불변으로서의 하나의 존재만 있을 뿐이다. 이는 감각보다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사고관이다. 그 유명한 제논의 역설을 보자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순 논리적으로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 감각적 판단이 아닌 논리적 판단을 우선시 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사물은 운동과 변화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정지나 불변은 일시적인 현상 또는 운동과 변화의 과정에 불과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가장 유명한 명제로 '우리는 결코 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한마디로 처음 들어간 강물과 후에 들어간 강물은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에 들어갈 당시의 강물은 이미 저멀리 바다까지 가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과 변화를 주관하는 것은 바로 로고스라고 주장한다.
변증법
인식 즉 직관과 사유는 인식 대상인 개별 사물을 어떤 규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규정성은 개별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속성이라는 측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은 경계를 따라서 설정되기 마련인바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경계를 통해서 이것은 경계 안의 것으로 이것이 아닌 것은 경계 밖의 것으로 설정되곤 한다. 경계는 간단히 안과 밖을 구분해주면서 안의 사물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마치 빨간색이 빨간색이기 위해서는 파란색과 경계가 그어져야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는 제논의 관점과 같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운동하며 변화는 양상을 보여준다. 하다못해 빨간색과 주황색 사이에는 어느즈음에서 경계선이 성립하는 것일까? 경계는 확고 부동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경계 안에 있는 인식 대상을 바라보는 어떠한 규정성은 그 안에 부정을 이미 함축하게 된다. 따라서 경계는 긍정과 부정사이를 포괄한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운동성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전체적으로 지양되어 경계는 소멸된다. 하지만 그 소멸된 경계는 그 즉시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새로운 경계로 나아가게 되고 이와 같은 지속적인 부정의 부정을 반복하면서 규정의 경계를 넘어 전체의 관점에서 직관하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운동과 변화성을 깊게 받아들이게 되며 이러한 운동과 변화의 원인은 모순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모순은 이율배반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대립성의 의미로서 예컨대 어떠한 사물을 의식을 할때 이를 지각한다는 것은 각각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통해서 파악하게 되며, 이때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속성들로 인해 한편으론 사물을 속성들의 합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배타적 일자로서 보이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다와 일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운동 그 자체이며 그 운동성을 자각하는 것은 지각이 아닌 오성이 된다. 즉 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원적 특성을 운동성 안에서 오성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결국 이 모순성이라는 것은 이미 사물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진보한다고 본다. 이러한 부정의 부정의 과정이 정신현상학 전체의 체계인 것이다. 부정의 부정은 간단히 말해 정립과 반정립을 통해 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지양이라고 하는데 지양이란 어떤 것을 정과 반을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긍정하는 것으로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진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통해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더욱 더 이성적인 방향으로 진보하게 된다고 보게 된다.
경계선과 한국전쟁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경계선이라는 것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하나의 선이다. 선이 그어지면 공간은 이분되면서 소통불가능성이라는 형태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선이 견고하면 견고 할 수록 이 불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는 하나의 주체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선을 그을 수도 있으며 개인과 개인사이에서 선을 그어 소통불가능성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더 크게는 국가적 측면에서도 선을 그을 수 있으니 분단국가인 우리는 가상의 선을 하나 그어 놓은채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게 된다. 간단하게는 하나의 주체의 내부에서 나타나는 경계선에서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간에 나타나는 수많은 경계선이 가지게 되는 의미는 단절 그리고 억압을 의미하게 된다. 소통불가능성을 의도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경계선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공간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공간에 선을 긋는다 하여 그 하나의 공간이 본래적으로 다른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간 그 자체는 균질하며 원시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는 가상의 선을 하나 그어 그 선의 이쪽과 저쪽이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의 마음에 선을 긋는다 하여 그 주체가 두개로 나뉠 수 없듯이 말이다. 선은 그냥 가상일뿐이다. 다만 우리는 변증적 차원에서 높은 차원의 합을 알지 못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선은 그어졌고 그 선이 견고하면 할 수록 그 선을 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나게 된다. 선을 넘고자 하는 자들의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양공간에 속해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선위에 서려고하는 자들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탄생하게 되고 무엇이 되었건 경계위에 선자가 가지는 목적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양공간이 가지는 경계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억압성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데올로기라는 허구의 사조에 의해 균질했던 공간의 이분화에서 억압은 시작된다. 이 세상을 설명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관념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허구성을 가진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었던 본래적 목적의 상실과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자기목적성을 가지게 되면서 나타나는 일련의 현상으로 그 자신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진보 혹은 변증법적 나아감에 대한 자기부정에서 발생하는 허구성이다.
이러한 허구성은 균일했던 공간에 존재하는 파편화된 주체들의 소통가능성을 막게 되고 이러한 소통불가능성은 급기야 여러개의 경계선을 세우기에 이른다. 시작은 하나의 경계선이었지만 그 경계선 자체가 자기복제하여 두개, 세개, 네개 이상의 경계선으로 분열하여 양공간 내부에서도 또 다른 공간적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가 스스로 존재하고 유지하기 위한 자기 목적성으로의 변질로 인해 생겨나는 안타까운 현상이다.
영화를 보면 참 인상깊은 연출이 많이 보인다. 영상미가 대단히 아름다운건 둘째치고 독특한 시도가 많이 보이는데 특히 인상깊은 부분은 다들 아시는 팝콘비. 이부분은 가히 상상력의 결정체가 아닐까? 팝콘비 장면에서 국군과 인민군은 동막골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서로 대치중이다. 재미있는건 저 대치중인 상황 그 자체인데 서로 양쪽에 선채 마을 사람들을 사이에 두게 된다. 사실 모든 영화가 그렇듯 공간이라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꼭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딛고 서있는 무형의 틀 그 자체도 하나의 공간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물리적 공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크게 없고 중요한건 각 캐릭터가 캐릭터성을 이루게 되는 형식으로서의 공간. 즉 캐릭터의 내면에 존재하는 표상형식공간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크게 3가지 공간이 존재한다. 국군과 연합군으로 표상되는 세명의 인물과 인민군으로 표상되는 세명의 인물 그리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동막골. 이 세공간은 각각 세가지 표상형식을 보여준다. 사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관념형태가 사회적 기반과 연결시켜 이해하게 되는 하나의 관념틀이다. 인간이라면 어떤 누구도 이 관념틀에서 결단코 벗어날 수 없다. 이 관념틀은 그 사회의 문화와 역사, 법 등으로 인해 만들어지게 되고 그것이 그 사회 구성원에게 주입되는 식이다.
그리고 모든 외부세계의 지각들은 이 관념틀을 반드시 거쳐서 인식되게 된다.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대립하고 있는 두 집단. 즉 국군과 인민군이라는 집단은 두개의 이데올로기이자 두개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이들과 동시에 제시되는 제3의 공간은 바로 동막골이다. 이 공간은 정치성을 가지지 않은 공간이다. 물론 이들도 그들 나름의 문화와 삶에서 만들어진 형식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유없는 전쟁을 벌일만큼 맹목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 대단히 순수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터지는 사건은 팝콘비이다. 아주 유명한 장면인바 옥수수가 수류탄에 의해 팝콘이 되는데 그 팝콘들이 하나의 꽃이 되어 꽃비가 되어 내린다. 어떤면에서 보면 팝콘이 되는거 자체가 뭐가 대단하냐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옥수수라는 존재와 수류탄이라는 존재의 만남 그 자체가 중요하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존재의 만남을 통해 탄생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꽃비이다. 옥수수 하나하나가 꽃망울을 터트리듯 아름답게 터져 꽃이 되어 슬로우 모션으로 내리는 비는 두진영의 군인들을 천천히 감싸안으면서 그들을 감싸고 있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어간다. 꽃비가 내리는 순간 감독은 인물 한명 한명을 비추면서 팝콘비로 그들을 감싸안게 되는데 이 장면이야 말로 이 영화의 백미이다. 이러한 장면은 하나의 균질한 공간안에 그어진 가상으로서의 선이 가지고 있는 운동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즉 정치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하나의 균질한 공간 자체를 깨닫고 지양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팝콘비가 개개인을 천천히 휘감으면서 그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면 영화에서 나오는 두번째 유의미한 사건인 멧돼지 사냥을 통해 그들을 이루고 있는 경계선과 그들 내면의 인식틀이 무너지게 된다. 마치 과거 무성영화를 보는듯 모든 대사를 제거한채 음악만 깔아놓고 배경과 인물의 분리라는 촬영방법을 선택하여, 각 캐릭터들이 이데올로기라는 배경에서 분리되는 것을 정확히 집어내어 표현하게 된다. 멧돼지 사냥을 통해 양진영의 군인들의 내면에 담겨져 있던 이데올로기라는 형식틀은 완벽하게 사라지게 된다. 팝콘비로 희미해진 경계가 멧돼지를 통해 사라지게 되고 서로 고기를 구워먹으며 기존에 존재하던 형식틀을 거쳐서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닌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한국 문화에 의해서 형성된 틀을 거쳐서 상대를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가상으로서의 경계선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변화무쌍한 것인가를 통해 그것의 허구성을 깨닫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이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스미스를 구하러 온 군인들과의 충돌장면이다. 그들은 낙하하여 동막골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주민들을 협박하며 빨갱이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들은 이미 같은 공간에 서있는 자들이 아니다. 이 장면에서 여전히 경계선만을 인식하고 반대편 공간을 억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사로잡힌 군인과 그것을 벗어던진 군인들이 극명하게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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