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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화/영화 이론

영화에서 찾는 인문학

유쾌한 인문학 2016. 3. 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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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찾는 인문학


최근 들어 영화와 인문학의 만남이 잦다. 아마도 영화라는 매체가 인문학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2015년에만 240회가 넘는 영화 읽어주는 인문학 강연을 하였는데, 확실히 영화가 인문학에 대한 부담감을 낮춰주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쉽고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많은 강연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영화와 인문학을 통해서 알고 싶어 했던 것은 어느 무엇도 아닌 바로 사람의 이야기였다.

영화는 반드시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추억을 지우기로 결심하는 조엘(이터널 선샤인),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채 희망을 잃어버린 레드와 희망을 꿈꾸는 앤디(쇼생크 탈출). 귀신을 보는 두려움에 고통받고 있는 콜(식스 센스), 언 듯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영화 속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아닌 나의 삶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영화와 인문학의 만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삶을 인문학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 전 재개봉하여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터널 선샤인을 살펴보자.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 다른 성격에 이끌려 사랑에 빠져든다. 하지만 성격차이 때문에 점차 지쳐가던 그들은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심한 말싸움을 하게 된다. 다음날 조엘은 화해하기 위해 찾아가지만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고 이미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 집에 돌아온 그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 회사를 찾아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삭제해버렸다는 것이다. 화가 난 조엘은 자신도 클레멘타인을 기억을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엘 커플의 이야기가 그다지 낯설지가 않다. 처음엔 사랑해서 만났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지겨워지다 급기야 서로를 비난하는 그저 그런 모습은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억을 지운다는 설정만 영화 속에 새롭게 부가되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과거로 흘러간 기억과 그 속에 담긴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가진 많은 기억 속에는 감정이 담겨있다.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 조엘의 마음은 허무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마도 얼마 전에 싸웠던 기억 속에는 분노와 멸시의 감정이 담겨있을 것이다. 사실 조엘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멀지 않은 기억의 흔적이다. 기억은 단순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을 넘어 그때의 감정까지 현재의 나에게 전해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거의 연인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기억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기억 속에 담긴 감정은 현재의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과거의 연인은 언제나 나쁜 사람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엘은 기억을 지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과 만난다. 저 먼 기억 속에는 행복했던 순간과 감정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진 가장 못생긴 인형에 클레멘타인이란 이름을 붙여 못생겨지지 말고 예뻐지라고 외쳤던 어린 날의 상처를 털어 놓았던 기억. 어느 겨울밤 빙판 위에 나란히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순간.” 조엘에게 이 기억들은 너무나도 소중했던 잃어버린 시간이다. 현재의 조엘은 과거의 자신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만나버린 것이다. 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행복했던 과거와 최근의 분노어린 과거가 접속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놓쳐버린 의미를 발견하고 후회한다. ‘왜 그때 나는 그 의미를 몰랐을까?’

프랑스의 대작가 마르셸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쓴다.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화자가 어느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 조각 먹게 되는데 그 순간 과거 유년시절을 보낸 콩브레의 추억이 물밀듯 다가오는 경험을 한 것이다. 추억이 특별한 이유는 그때 느꼈던 감정이 지금의 나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담긴 감정이 과거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우연찮게 찾아온 나의 과거가 현재의 나에게 크나 큰 의미를 선물해주는 것이다.

사실 주변에서 조엘 커플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떤 이는 반복되는 과거의 아픔 때문에 새로운 만남과 사랑을 주저하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최근의 기억은 오직 고통과 아픔의 감정만을 전해준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 앞에서 느끼는 두근거림의 감정은 나의 잃어버린 시간이 전해주는 의미이다. 그 두근거림 안에는 과거의 내가 경험했었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담겨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담긴 일상의 이야기는 프루스트를 만나면서 더욱 풍성해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전해준다.

 

두 번째로 영화 쇼생크 탈출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감옥이라는 설정을 통해 우리의 삶을 여실히 드러낸다. 앤디는 유능한 은행가였지만 부인과 정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채 2개의 종신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들어온다. 교도소장인 노튼은 신입 죄수들 앞에서 교도소에서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해서 말한다. “규칙 첫 번째, 욕설은 안 돼. 내 감옥에서 주님을 욕되게 할 순 없어. 나머지는 차차 알게 돼. 난 두 가지만 믿는다. 규율과 성경. 주를 믿고 의지하라.”

소장이 이야기한 규율과 성경은 자신의 교도소 운영 철학을 보여주는 말이다. 쉽게 말해 엄격한 규율과 사랑(성경)이라는 지배적 가치에 입각하여 감옥이라는 작은 사회를 다스리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감옥은 신의 이름하에 모든 차별과 폭력이 눈 감아지는 곳이다. 신입 죄수가 첫날밤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지독한 구타와 함께 독방에 넣어버리고, 다음날 죽어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감옥 어디에서도 규율과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죄수들은 철저하게 폭력에 길들여진 채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렇게 자신을 길들여가는 폭력에 일말의 의문을 가질 수도 없는 상태이다. 신을 말하지만 정작 그 신은 죽어버린 감옥. 그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이 신에게 의지하는 이유는 삶의 모든 의미를 상실했을 때 그가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은 오직 사랑만을 통해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가치이다. 하지만 이는 예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 변질되기 시작한다. 사랑은 온대 간대 없으며, 심지어 면죄부를 구입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른다. 사랑을 통해 삶의 의미를 전해주던 종교는 이제 돈으로 그 의미를 팔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까지 왔을 때 인간이 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때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기독교가 설파하던 중심 가치가 유명무실해진 시대를 살아가던 그는 더 이상 신에게서 삶의 의미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죽여 버리는 것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감옥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잘 그려낸다. 한 사회의 기본 가치가 유명무실해져버리는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법한 일이다. 인간 중심적 경영을 하겠다는 회사에 입사하였지만 어느 곳보다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경영진. 인본을 중심에 놓고 교육한다고 하였지만 성적순에 따라 점심을 먹는 순서까지 정해버리는 학교. 우리는 알게 모르고 옳다고 여겨왔던 가치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결국 이 작품은 굳게 믿어왔던 가치가 허상으로 밝혀졌을 때 다가오는 허무의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기존의 철학 논의는 항상 진리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론을 닦아나가는데 많은 힘을 쏟아부었다. 따라서 내용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대중들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여겼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보는 인문학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도리어 삶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삶의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힘을 전해준다. 앞서 살펴본 두 영화에 담긴 이야기는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조금 다르게 담겨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 이야기는 인문학과 만나면서 생각의 깊이를 더해준다. 대단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나의 삶을 바꿔주는 생각에서 아찔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거창한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다양한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야말로 어쩌면 가장 완벽한 철학 교실일지도 모르겠다.


*KEB하나은행 VIP지 <골드클럽> 12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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