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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E (WALL-E), 로봇과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세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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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E (WALL-E), 로봇과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세상

유쾌한 인문학 2012. 9. 12.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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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E (WALL-E)
2008년 픽사는 9번째 작품으로 그들의 작품세계중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정도의 엄청난 작품을 내놓게 되는바 바로 월-E이다.  이 작품을 총지휘한 사람은 앤드류 스탠튼 감독으로 과거 니모를 찾아서에 이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월-E 다음으로 나오는 작품은 작년인 09년도에 나왔던 UP으로 피터 닥터 감독이 총지휘를 하게 되는바 과거 존 라세터 감독 이후 처음으로 감독을 맡게되면서 연달아 몬스터주식회사와 니모를 찾아서를 내보였던 감독들이 다시금 연달아 작품을 내놓으며 돌아온 것이다.  월-E라는 작품은 일단 만화가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핵심인 재미라는 측면과 유희적 성격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준다.  그러면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대단히 흥미롭다.  멸망해버린 지구와 우주를 떠도는 인간 그리고 로봇과 조화를 이루되 로봇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그렇다고 해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그리고 가장 특징적인 것은 로봇들의 인공지능이다.  주어진 임무가 있고 그 임무에 충실하지만 로봇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것으로 보인다.  영화 말미에 가면 회로판을 갈아끼운 월-E가 다른 로봇인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브와의 전기 키스를 통해 다시금 자신을 되찾는 장면도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영화의 배경만 놓고 보면 엄청나게 디스토피아적이다.  이건 뭐 이보다 더 암담할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분위기는 대단히 유쾌하고 즐겁게 흘러간다.  디스토피아와 유쾌한 분위기의 만남.  그렇다면 먼저 디스토피아란 무엇이며 그 세계관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겠다.  


디스토피아

월-E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 문명은 어마어마한 기술적 진보를 이룬 상태로 보인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도 존재하며 인간의 삶도 아마 풍요롭기 그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니지가 넘치고 식량 마저도 풍족해진 사실상의 유토피아가 이루어진 세상을 만드는데 성공한 인류는 지독할 정도로 소비 위주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양산하여 지구 환경을 망치기에 이른다.  이에 지구 대청소 계획을 세우게 되지만 지구 청소 대작전은 실패하고 우주선의 주메인 로봇은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채 그속에서 무려 7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게 된다.  인간은 움직임을 극히 제한하여 전부다 비만에 걸린채 자동의자를 타고 다니고 서로서로 마주보고 대화하기보다는 모니터를 통해서 대화하고 똑같은 옷에 똑같은 음식.  그렇게 아주 획일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태이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우주선을 만든 회사가 최고라는 식의 교육도 받게 된다.  그러면서 딱히 이러한 삶에 대해서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모든 갈등과 불만은 물질적 궁핍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바 이러한 물질적 궁핍과 가난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을지언정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또 다른 사회의 망가짐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완성의 무엇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유토피아를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어 생각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천국과 같은 허망하고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관념의 세계로서 생각될 여지가 있지만 반대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그 사회가 나아가야할 어떤 목표와 같은 것으로 설정되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을 가지게 된다.  근대에 들어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철저한 계몽주의적 사고관과 현실 비판적 측면을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이성은 낙관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되려 집단에 대한 맹신과 폭력 등으로 대표되는 비합리적인 측면을 양산한채 2번의 세계대전과 경제적 공황의 상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부터 등장하는 것이 디스토피아 문학이다.  이성에 대한 불신과 진보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한 디스토피아 문학은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적 사회 그 자체가 불안하고 불완전한 것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게 된다.  결국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기술적 진일보와 이상향으로서의 목적 자체는 이루는데 성공하지만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바라보는 것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측면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디스토피아 문학으로 대표적인 작품은 오웰의 1984,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을 들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기가막힐 정도로 발전된 과학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게 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되려 계획과 통제 안에 사로 잡힌 존재 전락하고 만다.  


월-E의 세계는 어떠할까?  21세기의 디스토피아 영화라 볼 수 있는 이 작품 역시 상당히 진일보한 기술의 향연을 보여주게 되며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보통 이런 상황속에서 디스토피아 문학은 전체주의적인 양상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자유는 없으며 철저하게 계획과 통제안의 존재로서 전락시키는 것인데  월-E는 그런 극단적인 면 보다는 인간 스스로 게을러져버렸다는 설정을 가져오게 된다.  인간은 이성을 활용하여 기술문명을 최고조로 발전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이때부터 이성은 기술 문명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모든 부분을 기계에 맡겨버리고 이성을 통해 사고하는 것을 거부한채 지독할 정도로 쾌락위주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들이 굉장히 재미있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로봇과 인간의 조화

우리는 흔히 '당연하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사안에 대한 획일적인 정답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안은 단순히 수학적 진리와 같은 자명한 것에서부터 사변논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까지 다양하게 등장하게 되는바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후자이다.  다양성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식의 말이 나온다는 것은 그 사안에 대한 인식의 틀이 대단히 확고하다는 것인바 극중에서 저러한 삶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도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건 그 인식의 틀이 확고하다못 해 고정불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속 우주 항모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의 삶이 과거 조상님의 삶과 똑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무나도 자신들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인식의 틀 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로봇이다.  우주선내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고 시중을 들어주기도 한다.  재미있는건 이러한 로봇들은 자신에게 정확히 주어진 임무가 있음과 동시에 단순한 로봇의 수준을 넘어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의식을 가진 로봇인 월-E와 이브의 스토리가 이어지는바 이 이야기가 이 영화의 메인을 이루게 된다.  월-E의 세계관에서는 되려 로봇들이 굉장히 이성적이고 적극성을 가진 존재로서 그려진다.  그렇다고 모든 로봇들이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억압한다거나 핍팍하는 양상 역시 크게 드러나진 않는다.  


하지만 식물을 가지고 온 이후부터 우주 항모의 메인 컴퓨터인 오토는 지구로의 복귀를 거부하고 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잘못된 정보와 명령에 입각한 행위이다.  여기에서 로봇들 사이에서도 크게 보아 두가지 양상으로 나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 철저하게 계획과 통제에 입각한 로봇과 어느 정도의 자율을 추구하는 로봇이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월-e나 이브 그리고 그외 미쳐버린 로봇들을 들 수 있겠다.  심지어 청소로봇의 경우는 통제와 목적에 입각한 로봇이지만 스스로 이동 선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율성을 찾아가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부분이  월-E가 가지는 가장 독특한 점인데 쾌락에 빠져버린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방향을 로봇이 제시하게 되고 그 과정속에서 협력과 우정을 쌓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디스토피아 문학이 보여주었던 기술 문명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아닌 기술 문명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환경 윤리에 대해서 좀 더 완화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황폐화된 지구와 환경윤리
일단 지구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엄청난 소비로 인해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린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리고 이에 인간은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로 떠나게 된다.  그 사이 지구는 수많은 월-E들이 쓰레기를 치우게 되고 쓰레기가 다 치워지면 다시 인간은 돌아와서 지구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배경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실패하게 되고 청소부 로봇들도 다 부서진채 오직 하나의 월-E만 남은채 홀로 애완 바퀴벌레를 키우며 묵묵히 임무를 진행중이다.  고장이 나면 죽은 로봇들의 부품을 떼와서 자신의 몸을 대체시키고 청소를 하며 자신이 마음에 드는 수집품을 모으기도 한다.  현재 지구는 쓰레기도 문제지만 사막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식물에 많은 의미 부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식으로 자연 환경이 망가질 것을 염두에 둔채 자연을 획기적으로 보호해야 하고 소비를 확 줄여야 하는 것일까?  많은 급진적 녹색 단체들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주장은 사실상 가능하지가 않다.  더욱이 인간 자체가 하나의 유기물 덩어리로서 수많은 폐기물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으며 비단 인간 뿐만 아니라 탄소로 이루어진 모든 종류의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폐기물을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인간은 끊임없이 도구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 그것의 극단적인 발전이 바로 기술 문명이며 로봇들이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 중요하게 되는 것은 조화가 될 것이다.


먼저 살펴볼 부분은 자연에 대한 가치 부여자로서의 인간의 태도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면서 주체 이외의 객체 심지어 같은 인간에게 마저도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에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데 이러한 가치는 크게보아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바로 목적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이다.  목적적 가치는 특정한 객체가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의미하며 그것을 도구로서 이용하여 얻을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가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목적적 가치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랑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상대방을 도구로 바라보아 유용한가 아닌가? 로서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 무제한적인 무엇이다.  


반면 도구적 가치는 그 객체를 오로지 도구로 바라 보아 도구로서의 유용성에 따라 가치를 매기게 된다.  이러한 도구적 가치는 그 객체가 그 자체로서 특정한 가치를 가진다기 보다는 그 객체를 수단으로 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가치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 환경 예컨대 숲을 보았을때 한편으론 그 숲의 나무를 이용하여 다른 땔감이나 그외 가구를 만드는 것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그 숲의 나무를 베어내어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때 얻게 되는 이익과 그 숲을 다시 조성하기까지의 비용을 비교했을때 전자가 더 크다면 숲은 베어내도 상관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도구적 가치를 매김에 있어 그 범위를 더욱 확장하여 바라보게 된다.  즉 단순히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라는 측면보다는 그 나무가 내뿜는 신선한 공기 그리고 그 숲이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생명 자원 따위로 그 범위를 확장하게 되고 이러한 확장된 범위내에서 그 가치를 계산하게 되면 나무를 베어내어 다른 무언가를 얻는 것보다 그냥 보존하는 것이 더 큰 가치를 가지게 되어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 더 옳바른 행위가 된다.  


이렇듯 환경을 넓게 보아 도구로서의 가치를 새롭게 바라보는 태도도 환경운동으로서는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저것은 결국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환경운동이라는 것은 대부분 자연에 대해 어떤 특정한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이러한 목적적 가치를 강조할때 주로 내세우는 것이 자연이 가지는 영적인 측면 따위가 되는바  이러한 태도는 전통적인 윤리 이론 예컨대 상대주의, 절대주의, 이기주의, 공리주의, 형식주의 따위들과 명백한 차이점을 보이게 된다.  전통적인 이론은 인간이 행위를 함에 있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즉 실천적 측면을 규칙으로서 제시하는 것이 강조된다.  반면 최근에는 이러한 지나친 규칙성을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덕의 윤리 즉 덕의 성품을 가진채 목적적 가치에 대해서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목적적 가치를 추구하는 환경 윤리 역시 명백한 한계를 가지게 된다.  내용인 즉슨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굉장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는바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태도는 지독한 회의주의로 빠져들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자연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아 생명 중심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명존중의 관점을 가지게 되면 생명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목적적 가치를 존중하게 되고 더 넓게 보아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위해 일반 규칙으로서 폴 테일러(Respect for Nature)는 크게 네가지 의무를 제시한다.  첫째는 불침해 의무이다.  이것은 소극적 의무로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해를 끼쳐서는 안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생명이 인간이 아닌 우연히 입을 해를 적극적으로 방어해서도 안된다.  둘째는 불간섭 의무이다.  이 또한 소극적 의무로서 각 생명이 가지는 그들의 생명으로서의 목적에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거나 관리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셋째는 성실의 의무이다.  예컨대 생선을 낚시를 한다고 했을때 이러한 낚시는 결국 생선을 속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생선을 속인다는 것은 이성이 없는 동물을 열등하게 바라본다는 태도에 다름이 없으므로 각 생물에게 성실하게 임하라는 의무이다.  넷째는 보상적 정의의 의무이다.  인간이 고의이던 과실이던 어느 생명에게 해악을 끼친다면 그에 적극적으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실수로 어떤 동물을 다치게 했을 경우 그 동물을 회복시켜주어야 하는 의무가 된다.  


위의 규칙은 자연을 존중하기 위한 일반적 규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모든 윤리의 문제는 언제나 가치 충돌의 경우가 핵심적 문제가 된다.  환경과 자연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 속에서 다른 생명체와 가치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가치 충돌의 문제가 발생했을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폴 테일러는 몇가지의 규칙을 제시하게 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생명체가 가지는 이익을 두가지 측면 기본적 이익과 부수적 이익으로 나누어 판단해야 한다.  첫째는 자기방어 규칙이다.  예컨대 호랑이나 사자가 인간을 죽이려 들때에는 인간의 기본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방어로서 호랑이나 사자를 죽일 수 있다.  두번째는 비례의 원리이다.  인간이 모피코트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일 경우 인간이 원하는 이익은 부수적 이익에 불과하고 그로 인해 희생되는 것은 동물의 기본적 이익이다.  이런 경우에는 비례의 원리에 따라 생물의 기본적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  세번째는 최소악의 원리이다.  이는 비례의 원리와 같은 경우이지만 모피코트 사례와 같이 생명의 빼앗는 등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적절히 양립이 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 거대한 댐을 짓는다고 했을때 이는 필연적으로 생명의 삶의 기반을 파괴하게 되는바 이는 양립 가능한 경우로 보아 최소한의 피해를 감안하여 허용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폴 테일러에게는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는데 첫째는 그가 중요시 여기는 생명에 대한 가치는 지나치게 개체위주라는 것이다.  테일러에 의하면 결쟁과 갈등은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라고 바라보게 되고 따라서 개체에 대한 존중은 있으되 큰 틀에서의 종에 대한 존중이 미생물 따위에 대한 존중은 없게 된다.  이를 위해 전체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환경 이론이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지나친 생태주의에 다름이 없다.  인간은 기술을 발전시키고 스스로를 위해 환경을 변화시키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나친 인간 중심적 사고관으로 의하여 온 세상을 쓰레기로 뒤덮어 그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된다.  결국 핵심은 균형이다.  영화속에서 로봇들이 자율성과 타율성을 가진 두 부류로 나뉘듯 인간의 이성 역시 스스로 자율서을 가진채 합리적으로 적절히 조절을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마무리
이상으로 본바와 같이 월-E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실로 대단히 놀랍다.  사실 이러한 주제는 이미 많이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풀어내는 획기성이 돋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주제의 영화가 나오면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고 비판하곤 한다.  얼마전 개봉한 아바타에서도 이러한 비판점이 눈에 보였는데 이부분에 대해 난 이런말을 하고 싶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뭐가 있던가?'   되려 뻔한 주제를 가지고도 그런 작품을 못만들어내는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건 아닐련지.  아니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월-E같은 세계관을 얘기하면 헛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획일적인 문화와 사고방식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디서 보고 들은건 있는지라 창의력과 상상력이 중요하다며 허구헌날 떠들어대지만 정작 그런 희안한 상상력을 얘기하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일갈을 날려버리는 이상한 조직문화에서 과연 어떤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는지 극히 의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초과학을 무시한다는 말을 자주사용하곤 하는데 기초과학 못지 않고 기초인문학도 철저하게 무시하는게 현실이고 이러한 빈약한 사고의 틀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세계관이 창조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모든 문화의 창의력.  그 시발점은 사고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며 그 사고의 다양성은 다양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은 인문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해보면서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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