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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공론장의 부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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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공론장의 부활

유쾌한 인문학 2010. 12. 2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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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걸 논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한다.  정치라는걸 바라보는 태도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정치를 개념 지으려고 노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나의 틀을 가지고 현실정치를 바라보는 방식은 그다지 옳지 않다고 여겨지며 현상학적으로 바라보는 방법론을 취하는게 정치의 영역에서는 합리적이라 판단된다.  
 
 
인간의 복수성
인간은 복수성을 가진다.  내안에 너가 있고 너안에 내가 있으니 난 복수다라는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개성에 있다고 본다.  동물이야 어차피 먹고 자고 생식하면 만족하는 개체들이니 그들사이에 개성을 부여하긴 힘들다.  하지만 인간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고 싶은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일이라는게 항상 꽃만 될 수는 없는 바 독약이 되기도 하고 잡초가 되기도 하게 되는거고 그러다보니 적당히 조율을 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것이 바로 정치다.  정치라는걸 현대적 의미의 정치인만 하는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의 삶은 정치의 연속이다. 


사람을 끌어올려면 첫째로 인간적인 매력이 있거나 아님 학문적으로 매우 존경할만하고 배울만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엄연히 상대방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니 약간 다른 문제이고, 두번째로 사람을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먼저 당신에게 가서 꽃이 되는 방법이다.  내가 당신에게 가서 꽃이 되어 주었으니 당신도 여기에 와서 꽃이 되어 주는 것 아닌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정치적 계산을 통해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결국 정치라는 것은 인간의 개개의 복수성을 공적인 부분에서 드러내고 인간관계의 엄청난 그물망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이 둘의 차이점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사적인 것의 공적인 것에의 침투가 바로 사회적인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차이점이 분명하였다.  사적인 것이야 먹고 자고 섹스하고 이런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이고 공적인 것이야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그대로이다.  다만 현대와 차이점이 있다면 경제적인 문제는 고대에는 사적인 문제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중세 근대 현대로 넘어오면서 사회가 거대해지고 재산->부->자본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확대되면서 경제적인 문제는 더이상 사적인 영역에서 머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것들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경제적인 문제라는 게 사실 사적인 문제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다.  생존과 관련된 부분이니 말이다.  결국 사회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쏠리면서 공적인 부분이 억눌리게 된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 이런 거다.  '난 먹고 사는거에만 관심있지 정치는 알바 아니다'  바로 이거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인 것의 횡포는 획일성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은 복수성에 존재하는데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기준을 마련한채 그것을 강요하게 되고 더 웃긴건 인간이 여기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치 같은 파시즘인 것이고 사실 우리사회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우위사회의 대중의 이중성
대한민국 국민이 보여주는 태도는 매우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고고한척 높은 도덕성을 설정하고 저들을 비난하고 힐난하지만 그 이면에 우리 스스로가 보여주는 비도덕적 행동.  자본우위의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제시된 억압을 스스로 받아들여 확대재생산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  정치인들은 무슨 특별난 사람인가?  그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따지고 보면 옆집 아저씨에 불과하다.  결국 저들의 저런 모습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해결 방법은 있기 마련이고 그 방법이란게 특별난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공론장 부활을 통한 복수성의 회복
우리사회의 정치불신의 수준은 이미 정도를 넘어섰으며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 시끄러운것은 안좋은걸로 생각하는데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정치가 시끄럽다는건 사람들이 사회적인것에 억눌리지않고 정치적인 부분으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 많으면 많을 수록 다양성이 생성된다.  말이 많으면 많을 수록 상대방과의 정치적 타협이 점점 많아진다.   하지만 한국이 말이 많아진건 사회적인 것의 말이 많아진 것일 뿐이다.  


유럽이 근대에 돌입하기 이전 부르주아 계층들은 아주 독특한 문화를 한가지 형성해 낸다.  커피숍 같은곳에 보여서 일종의 모임같은걸 가지는 것인데 이는 즉 집안 내부공간은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사생활을 중요시 하여 각자의 방을 가지게 되고 집안에는 샬롱이라고 하는 하나의 거실같은 열린공간만을 두게 된다.  이렇게 내부적으로는 개인적으로 변화하여 갔지만 외부적으론 개인화된 부르주아들이 커피숍같은 곳에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대화와 토론등의 행위를 하게 되는데 어느정도의 경제력과 지식을 갖춘 그들의 저런 토론문화는 여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게 된다.  즉 저 커피숍 같은 곳은 바로 공론장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연 저러한 공론장을 가지고 있는가?  이미 거의 사라져버린 모습이다.  거대도시는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고 이런 거대 도시가 성장하면 할 수록 그속에서의 인간계량화는 더욱 더 심화될 것이다.  그러니 공론장 문화같은게 생겨날 여유가 없는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름의 대안이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인터넷이다.  무한에 가까운 열린공간.  계량화된 인간의 계급성이 무시되는 곳.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뿜어낼 수 있는 곳.  이런 가능성은 나도 알고 있고 여러분도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현재의 인터넷이 이런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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