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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로드(2009), 존재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본문

영 화/00's 영화

더로드(2009), 존재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유쾌한 인문학 2010. 1. 20.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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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로드(The Road)
원작이 있다고 들었는데 원작은 보지 못했다.  사실 이 영화를 볼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 본 이유는 티스토리 이벤트때문이다.  공짜책 욕심에 보았다고나 할까.  짧고 간결하게 바로 시작해보겠다.  영화 내용은 공개된 시놉시스 외에는 거의 언급하지 않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Copyright (c) Sony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세상의 멸망과 무채색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멸망했다.  왠만한 생명은 다사라진채 몇안되는 인간들만이 세상을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한 부자父子가 길을 걷고 있다.  온통 세상은 회색빛이고 그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상황을 못견뎌 자살을 하기도 하고 먹을 것이 없으니 식인을 하기도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양심도 없는 절대자라고도 할 수 있을듯하다.  어찌 상황을 저장단을 만들었을까?  하지만 신의 입장에선 이렇게 대변할 수도 있겠다.  "내가 도대체 언제?  나에게 의지하라고 했느냐?"

인간의 역사가 문명화 과정의 역사라면 그 문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양태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인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어떤 존재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길들인 것이다.  하지만 근대 합리주의의 시작과 함께 신은 죽어가기 시작하였고 신이 죽자 인간은 그자리에 도덕이라고 하는 비슷한 절대적인 것을 두기 시작한다.  어떤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을때 우리는 흔히 '어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  라고 말하게 되는데 그때 기준이 되는 것은 신이 될 수도 있겠고 도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양자는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속의 상황은 기존의 인류문명이 구축해놓았던 것들.  즉 다양하게 표현되는 절대자와 그 절대자에 대한 의존성이 철저하게 사라진 상태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개별대상을 경험할때 다양한 인식기관을 통해 그것을 지각하곤 하지만 그 지각 자체가 명증성을 가진다고 보긴 힘들다.  사실 인간의 인식기관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것도 웃긴일이고 거기에 다양한 유형의 선입견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시야가 흐려지면서 본질을 놓치게 된다.  결국 이러한 다양한 은폐성이 바로 신이나 도덕따위의 절대자라는 칭호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게 아닐련지.  그리고 그 절대성에서 개별성이 다시 도출되니 세상의 왠만한 개별성은 그 근본부터가 은폐되어있기에 그 본질을 보기가 힘들어진다.  법학으로 치면 엄폐물의 법칙이랄까.  하지만 아무리 개별직관들이 우리의 시야를 흐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숨어있는 그 본질을 직관하였기에 개별적인 직관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본질직관을 통해서 한가지 더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존재' 그 자체이다.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상황은 인간이 이 세상을 바라볼때 흔히 경험하는 표면적 세상을 넘어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던 본질적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전반적인 회색빛 무채색은 바로 저러한 다양한 선입견을 완벽하게 제거하였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이 지점에서 영화속에서 왜 세상이 멸망했는가?  라는 질문은 정말 무의미하다는 것이 도출된다.


Copyright (c) Sony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인간의 존재의미
인간이 이 세상의 모든 다른 대상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줄 안다는점이다.  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고 나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존재 방식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예컨대 내가 살고 있는 집이나 그외 타인, 공기, 물 등등 이러한 다른 인간 또는 다른 객체라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벗어나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결국 세계속에서 다양한 존재자들은 서로서로 연관을 형성하며 의미있는 하나의 전체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간이 서게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외의 존재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은 어떤 대상을 만나기 이전에 비록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실존 및 그 세계의 전체의 실존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자라는 점이다. 

영화속으로 돌아가보자면 모든 것이 걷혀진 세상의 본질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양태가 실로 다채롭다.  무리지어서 식인을 해대는 사람들도 보이고 상황을 못견뎌 자살해버리는 사람도 보인다.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 도덕적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이미 영화속 상황 자체가 위에서 말했듯 모든 것을 걷어내버린 상황이니 말이다.  이 상황에 다시금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은 영화밖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현세상의 가치를 투영하는 것이기에 잘못된 방법이라 말하고 싶다. 

아무튼 영화는 우리에게 밑도 끝도 없이 세상이 망했다는 식으로 시작하게 되고 영화속 인물의 입장에서는 그냥 눈떠보니 저런 회색빛 지옥같은 세상에 던져졌다(被投性)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건 확실히 알 수 있지만 내가 왜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는 상황.  특히 영화속의 인물들은 이런 상황이 더욱 지독하다.  이건 뭐 어느날 눈떠보니 이런 상황이고 그속에서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 순간 인간은 기존에 있던 모든 쓸데 없는 것들에서 해방되어 자기 자신을 지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회적지위나 돈에 대한 집착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라는 인간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설정한 배경인 본질적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불안함을 잊고 그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해 영화속 사람들중 몇몇은 식인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게 된다.  무리지어 다니면서 인간을 사냥하여 스스로를 강자의 위치에 놓게 된다.  이는 영화속 배경인 본질적 세상이 아닌 그냥 보통의 일반적 세상에서 살아가던 그 습관으로의 돌아가기를 원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불안감은 바로 본질적 세상에 던져진 자신이 직면한 죽음에의 공포이다.  가장 순수한 공포와 직면했을때 인간은 가장 순수한 근원적 폭력성을 내보이게 되고 이러한 근원적 폭력성은 가장 순수한 폭력성으로의 양태를 보여준다.  즉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공격성이 바로 그것이고 이것이 극중에서는 식인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가 비단 그들에게만 다가갔을까?  영화속 세상에 던져져버린 모든 인간은 전부다 그러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  주인공인 아버지와 아들 역시 그 죽음의 공포로 인해 끊임없이 자살이라는 유혹에 끌리게 된다.  사실 자살이라는 것은 존재자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선택은 하나의 가능성이면서 그 다음은 존재하지 않은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이라는 절대적 가능성에 의해서 그외의 가능성 즉 다양한 현대에서 최고로 여기는 여러가지 물질적 가치의 비본질성에 대해서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Copyright (c) Sony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마무리
주인공 부자父子가 길을 걷고 있다.  저 길위에서 끊임없이 죽음과 직면하며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래도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서 말이다.  한편으론 둘은 충돌한다.  자신의 생존 그 자체에 집중하려고 하는 아버지와 그래도 나누려고 하는 아들.  이 두명의 부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앞으로의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企投性).  아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에 따른 실존으로의 길을 선택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을 지켜내고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로서의 양심에 따른 실존으로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해 부자의 정을 말하곤 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부자의 정이라는 것을 느끼며 감동을 가지는가?  결국 그것은 아들이 보여주는 실존의 방식과 아버지가 보여주는 실존의 방식.  즉 본질적 상황에 놓인 두 존재가 보여주는 그 실존에서 감동을 느끼는게 아닐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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