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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마일(1999), 사회체계와 편견에서의 해방 본문

영 화/90's 영화

그린 마일(1999), 사회체계와 편견에서의 해방

유쾌한 인문학 2010. 8. 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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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마일(Green Mile)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3번째 영화이다.  앞선 작품이 그 유명한 쇼생크 탈출이고 이 작품 이후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내놓게 되는 영화이다.  세시간에 육박하는 엄청난 시간대를 자랑하는 영화인데 그다지 지겹지 않고 꽤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원작이 있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생각해보면 이 감독의 모든 영화들은 전부 스티븐 킹의 작품에 기반하게 된다.  쇼생크 탈출도 그렇고 미스트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는 좋아하는 배우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중에서 아주 짧게 나오는 변호사 역.  이름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CSI 뉴욕에서 반장으로 나오시는 분.  이 사람을 되게 좋아한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대공황 당시의 시점의 미국 남부이다.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어느날 억울한 누명을 쓴채 사형선고를 받은 흑인이 한명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이 흑인에겐 엄청난 권능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으며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히 신에 가까운 권능이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었고 노예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에 살인범으로 오해를 받아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인물이다.  이 흑인과 톰 행크스 사이에 교감이 형성되고 교도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벌이며 치료를 행하게 되며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맥락만 보면 기적이라는 권능을 행사하는 흑인이 등장하기에 기독교인들이 상당히 열광하는 영화이기도 한데 솔직히 이 영화에서 기적이라는 권능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장치일뿐이며, 기독교적 사고관으로 예수의 재림식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는 지양되어야할 것이다.  물론 개인차이니 강요할 순 없지만 좀 더 큰 틀에서 바라본다면 더 많은걸 바라볼 수 있으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본글의 목적이다.




사회체계와 편견
미국 남부라고 하는 곳은 전통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 위주로 발전해온 지역으로 아주 보수적인 곳으로 칭해진다.  특히 노동력과 관련된 노예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보수적인 양상을 보여주며 급기야 전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저렴한 노동력의 필요성은 그 사회내에서 그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같은 인간이지만 그들을 저렴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억눌러야할 필요성이 존재하고 그 억압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는 무력감을 심어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렇게 완성된 사회체계속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들은 이 억압적 행위와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멸과 편견을 가지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떠한 의심을 가지기 힘들게 된다.  기독교 문화에 기반한 철저하게 이원론적 사고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이원론에 의해서 형성된 주/노 체계는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에 이 생각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인 것이다.  가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언어 습관 그 자체에 이미 그 사회의 문화가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체계와 문화를 습득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욕할거 하나 없다.  우리 역시 똑같지 않던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체계와 교육시스템은 통합과 복종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주입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집단 전체가 하나로 묶여야 하며 그렇게 묶여진 집단은 모든 것에 대해서 우월함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 우월함에도 단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딱 한치 모자란 열등함의 제시이다.  모든 것에 우월하지만 약간 부족한 열등감.  이것을 따라잡기 위해서 복종을 이끌어내게 되고 집단 앞에서 개인은 희생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이 바로 우리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허구의 단일민족 타령과 인종차별적인 양상, 백인 사대주의 그리고 사회전반적인 복종문화이다.

영화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이러한 사회체계와 편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의 흑인이 여자아이들을 살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그 아이들의 사체를 옆에 끼고 있었을뿐.  살인무기?  고의의 입증?  아무것도 없다.  오직 흑인이라는 편견과 열등하다는 사고관에서 그를 간명하게 사형선고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등과 열등의 분리는 그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 문화 특유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기독교 문화의 왜곡성이라고 볼 수 있는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기독교 문화의 폐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서 완성되고 그리스도에서 끝나게 되는 그런 종교인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이원론에 입각한 편견의 피해자인 흑인에게 최고의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지게 된다.  그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어떻게 보면 기독교가 내세우는 최고의 인간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제시하는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된다.  사회체계가 내포하는 편견에 의한 희생자가 그 사회체계가 최고로 치는 인간상에 가장 가까운 현실의 제시 말이다.  결국 체계는 그 인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런 인간은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흑인은 지속적인 가능성의 제시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허상의 것이어야 한다.  영원히 달성될 수 없는 목표 같은거 말이다.  그러면 체계 내부의 인간은 지속적으로 허상을 쫓으며 체계에 복종하게 된다.  체계가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방책인 것이다.  한마디로 완성될 수 없는 완성되어서도 안되는 이상향의 갈망?

이러한 시스템하에서 흑인과 교도소 사람들간의 화해적 양상이 대단히 흥미롭게 다가오게 된다.  감옥 그 자체는 이미 자신들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체계와 문화의 폐쇄성 그자체를 상징하게 되고 그 안에서 갇힌 사람들은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것들을 행하는 자 그리고 억울한 편견으로 억압받는자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감옥을 관리하는 지배층은 크게 보아서 도대체가 말이 안통하는 망나니와 이성적인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로 구성되게 된다.  결국 영화 내에 존재하는 감옥과 그 내부의 사람들 전체가 당시 미국 남부사회 전반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마무리
꽤나 괜찮은 작품이지만 바로 전작품의 명성에 많이 가리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감독의 대표적인 작품인 쇼생크 탈출을 유심히 보면 감옥이라는 구조 그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게 다가오게 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쇼생크 탈출이나 이 작품이나 다를게 없다.  똑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미스트 역시 똑같지 않은가?  이런 부분이 바로 감독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사고관이라는 것이다.  사회체계와 편견과 차별.  이 부분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  뭐 그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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