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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2011), 영화 세상을 바꾸다!! 본문

영 화/한국 영화

도가니(2011), 영화 세상을 바꾸다!!

유쾌한 인문학 2011. 9. 2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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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마님이 이 영화에 한다리 걸쳐있다 보니 예전부터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도가니라는 영화가 있다고 아동성폭행과 관련된 내용이고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고 했었다.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얼핏 기억이 났었다.  당시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던 그 사건.  엽기적인 사건은 좀 오래 기억하는 편이라 스치듯 생각났나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사건은 그렇게 묻히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냄비근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제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라곤 하지만 편집권이라는 막강한 권력 앞에서 표면의 정보는 추려질 수 밖에 없다.  순수한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정치판 마저도 정보의 홍수속에서 싸울 장소를 고르지 않던가?  김진숙은 영도에만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지속적으로 환기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바로 이지점에서 대중예술이 가지는 진정함 힘이 발견된다.




영화의 정치화
모든 문화는 사회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술은 사회와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과거 한때 국내에 수많은 조폭영화들이 만들졌다.  이 영화들 그 자체의 내재적 텍스트성은 가치가 없기에 별로 언급이 안되지만 이 영화들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과의 관련성과 그 영향력의 상호관계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가 있다.  즉 양자는 텍스트성이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문제 즉 상호관련적 텍스트성이 중요한 이유는 영화의 본연 즉 메시지 전달이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접근성이 높은 파급력 그 자체에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면 프랑스 68혁명 같은 굵직한 사건과 그 영향력을 들 수 있다.  68혁명 자체가 예술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예술 자체가 68혁명의 발단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누벨바그 영화들로서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나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1959)는 68혁명의 발단에 꽤나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68혁명 자체가 또 대단히 의미있는건 핵심적 가치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과거와의 단절,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에 대한 반기로 정리가 되다는 점이다.  이러한 운동에 누벨바그가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러한 혁명 정신은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긴말 할 것 없이 장 뤽 고다르의 말을 들어보자.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정치화이다. -  이말의 의미는 기존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영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획기적인 영화를 통해 새로운 정치성을 창출해내고 싶다는 의미이다. 

또 한가지 더 들어보자면 스페인 내전과 영화와의 관련성을 들 수 있다.  소설로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이 작품의 배경이 스페인 내전인바, 스페인 내전과 영화의 관련성은 한국에서는 거의 연구도 안되고 영화 자체가 수입이 안되어서 말하는게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영화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1943), 랜드 앤 프리덤(1996), 프론트라인(1996)을 들 수 있디.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을만한건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2006)을 들 수 있는바, 이 영화는 전면에는 판타지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후면에 스페인 내전 상황을 던지게 되는데 사실적인 내전상황과 판타지성이 만나게 되고 그 판타지성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제시되면서 스페인 내전의 실체를 대단히 환상적으로 그려내게 되는 작품이다.  즉 그로테스크 자체가 스페인내전의 그 복잡다단함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그외에도 미국의 마이클 무어가 식코라는 영화를 통해 미국의 사회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유명한 사건이다.  마이클 무어 작품이 가지는 힘은 흔히 잘안다고 생각했던 잘 모르는 부분을 극한까지 제시하여 공분을 끌어낸다는 점일 것이다.  복잡하고 장치를 사용하지도 않고 플롯을 남용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이웃이 등장하여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지독하고도 모순된 현실.  그 현실을 목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논의가 활발해진다면 권력의지는 그것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그것을 따르게 된다. 




공론장의 부활을 통한 복수성의 회복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광주민주화 운동과 영화와의 관련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처럼 이것이 강력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프랑스와는 독재의 질적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87년즈음에서야 첫번째 영화가 나오게 된다.  칸트씨의 발표회(87) 그리고 황무지(88)라는 영화가 있다.  1989년도에 "오 꿈의 나라"라는 영화가 나온다.  최근 영화로는 꽃잎을 들 수 있다.  무엇이 되었건 중요한건 사건이 영화에 영향을 주긴했지만 크진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거대 담론이 아닌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실체적 사건에서는 그 영향력이 점점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꼭 사회 고발적 영화일 필요는 없다.  관심받지 못한 영역들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가능하다.  꼭 영화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 힘을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현대사회의 거대함은 자본으로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 경제적인 문제가 크게 확대되고 경제적인 문제는 더이상 사적인 영역에서 머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것들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경제적인 문제라는 게 사실 사적인 문제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다.  결국 사회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쏠리면서 공적인 부분이 억눌리게 된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 이런 거다.  '난 먹고 사는거에만 관심있지 정치는 알바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인 것의 횡포는 획일성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은 복수성에 존재하는데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기준을 마련한채 그것을 강요하게 되고, 인간은 여기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파시즘인 것이고 사실 우리사회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문화는 공적인 부분에 대한 환기와 이를 공론장으로 이끌어내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거대 도시의 발달은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고 이런 거대 도시가 성장하면 할수록 인간계량화는 더욱 더 심화된다.  그러니 공론장 문화같은게 생겨날 여유가 없는게 사실이지만 나름의 대안이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인터넷이다.  무한에 가까운 열린공간.  계량화된 인간의 계급성이 무시되는 곳.  이러한 가능성의 확인하고 공적인 부분에 대한 환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건전한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게 된다. 


마무리
판사 죽여라!!  변호사 죽여라!!  이런식의 감정의 표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판사 변호사를 죽인들 법이 바뀌는건 아니니 말이다.  되려 이는 변호받을 권리를 침해할뿐이다.  중요한건 사회 현실에 맞는 법의 변화가 아닐련지.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이 그런걸 해주겠냐? 라고 말하지만 정치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꼭 그런것도 아니다.  정치의 핵심은 권력의지 그 자체에 존재한다.  권력의지는 색깔이 없는 무채색이다.  다만 자신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수권자의 색깔에 맞춰갈뿐이다.  결국 권력 수권자의 의지가 명확하고 강하다면 권력의지는 당연히 이에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를 가장 명확하고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곳이 바로 공론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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