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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족쇄가 되는 세상, 노동의 댓가의 상실

유쾌한 인문학 2011. 2. 15.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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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재능이 족쇄가 된다는 말.  어찌보면 참 희안하고 독특한 말이며 선뜻 이해도 되지 않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편적 상식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보편적 상식이 말하는 모범적인 답안은 재능을 발견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통한 재능의 획득을 거쳐 성공에 이르는 것이다.  사실 한국만큼 재능을 따지는 나라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능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고 봐야겠다.  많은 초등학생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영재라고 주장(소망)하고 그렇게 내려진 자의적 판단(소망)에 의해 영재 학원이나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예술 계통으로 보내기도 한다.  어떤면에서 보면 재능 과잉의 나라가 아닐련지.

이 재능이라는 말은 대단히 실체가 모호한 말이다.  획득한 능력도 이에 포함되지만 결국 중심에 서는 것은 타고난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타고난에 방점이 찍힌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타고난 가능성을 말한다.  이 가능성이라는 말은 객관적으로 수치화 될 수도 없고 자의적 판단이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러한 자의적 판단의 과잉이 영재 과잉과 영재 교육이라는 새로운 산업까지 만들어낼 정도이니 이것의 모호함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체가 완벽하게 없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딱 뭐라 완전한 객관적 설명은 안되지만 순 주관적 자의성을 배제하고도 약간은 보이기 마련이고 이때 우리는 흔히 재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결국 이 가능성이라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관심이다.  본인은 관심이 없는데 타인이 임의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자의적 판단의 극일테니깐.  재능이란 개인이 관심있고 취향이 있는 곳에서의 발전 가능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관심이 없다면 발전가능성 자체가 없기에 재능이란 말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고 관심과 취향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 예측하기 대단히 어려울 지언정 최소한의 발전가능성은 반드시 가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지독할 정도의 불예측성이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반드시 성공을 담보하진 않는다. 
사람이기에 그 발현의 시기도 재각기 다를 수 있고 어떤 면에서 보면 없을 수도 있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고 누가 그 자리에 갈것인지를 예측한다는건 불가능하다.  예컨대 20년전 천하장사인 강호동이 예능에서 저위치까지 갈 수 있을거라 누가 쉽게 예상 할 수 있었을까?  다만 그에게는 의외로 웃기다는 약간의 가능성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희박한 확률을 바라본채 뛰어드는 모든 사람들이 불나방 같은 존재들일까?  그건 아니다.  한국인은 흔히 재능하면 예체능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모든 분야 하다못해 공무원들에게서도 분명 이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심과 취향으로 선택한 분야에서 모든 사람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 즉 재능을 가지게 된다.


재능이 족쇄 - 정당한 노동의 댓가의 상실
우리는 보통 아주 평범하고 전형적인 직업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유는 대단히 간단한데 한국사회 전반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불안감이 안정감을 추구하게 만들고 그렇기에 최고가 되긴 힘들지만 최소한 유지는 가능한 그런쪽으로 몰려가는 성향이 있다.  안정을 추구한다는 이러한 경향 역시 일종의 취향과 관심이기에 비난할 여지의 것은 아니다.  중요한건 그쪽으로 몰릴 수 밖에 없는 사회 현실이다.  모든 분야는 똑같을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강호동이 될 수도 없다.  다만 그곳에 이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뿐이고 실패한다면 아쉽지만 그걸로 그뿐인 것이다.

문제는 많은 분야에서 그 과정에 이르는 길에서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밥 벌어먹기 힘들다는 말의 실체이다.  너무나도 쉽게 우리는 대박 아니면 쪽박식으로 나누고 특정분야로 진출하면 망한다는 아주 단편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는데 결국 이것의 실체는 노동의 댓가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과정의 길에서 최소한의 노동의 댓가가 안정적으로 주어지는 곳으로 몰리는 것 아니겠는가?

얼마전에 참 어처구니 없게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사하는 사람이 발생해버렸다.  혹자는 부모도 없느냐?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관두고 다른걸 하지 그랬냐? 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전부 본질을 비껴간 이야기일뿐이다.  중요한건 그분이 받지 못한 노동의 댓가이다.  안그런가?   많은걸 바라는게 아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이 가능한 "정당한" 노동의 댓가.  이것을 요구하는게 그렇게 문제가 되고 나쁜 것일까?  이것을 요구하는게 빨갱이 취급 당할만큼 사회주의적인 발상인 것일까?

혹자는 도대체 이나라에 그런곳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묻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분야는 너무나도 많다.  영화인이 아사하여 죽었으니 영화판을 좀 더 말해보자면 연봉 백만원으로 일하는 스탭들도 수두룩한게 현실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게 아니다. 
하다못해 하루 밥값 300원을 주는 대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두고 너무나도 쉽게 관두고 다른 일을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쉽게 바라본다는 말 외엔 해줄 것이 없다.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이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의 비율은 이미 50프로를 넘어섰다.  이 사건을 놓고 복지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지는 논리이다.  이 사건은 복지와 상관이 없다.  철저하게 이 사건은 노동의 댓가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니깐.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복지를 논하기 전에 먼저 논해야할 것은 노동의 댓가의 정당한 지불이라는 점이다.  왜 이걸 자꾸 망각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선 재능이 가능성이 족쇄가 된다.  어느 정도 실력이 담보 되지만 아직 최고의 자리는 못간 경우 일은 더욱 골치 아파진다. 
열망이 너무 강하기에 포기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이 서울 집중인 나라이다보니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다.  나의 노동의 댓가는 타인의 부동산 위에 만들어진 불로소득으로 고스란히 진상된다.  이는 전형적인 현대판 소작농이다.  부모의 자금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서 정당한 노동의 댓가마저 상실한다면 여기에 몇가지 상황과 개인적 특성이 겹쳐지게 되면 또 다시 아사하는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을까?  최고의 영광은 위대한 두뇌를 가진 국가와 민족 탓이고 그 과정은 철저하게 개인의 탓이라면 너무 웃기지 않나?      

정당한 노동의 댓가 상실은 결국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 분야로 몰리게 하는 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이는 결국 다양성의 상실.  문화 전반의 저변 폭의 상실.  그리고 특정 분야에 있어서의 아귀다툼.  그로 인한 그 영역 내에서의 노동의 댓가 상실을 불러온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 연결 고리인 것이다.  경제 흐름이 선순환 되지 않고 악순환으로 돌고 돌아 최악의 결과만을 낳게 된다.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였다면 이런 상황까지 갈 이유도 없고 갈 필요도 없는거 아닐련지.  기업의 단기적 이윤을 위해 박탈한 노동의 댓가의 결과가 아사라면 난 정말 묻고 싶다.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속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국가가 나를 아사로 몰아간다면 나 역시 국가를 유지하는 일원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우리가 굳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이루고 살아야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던져지고, 이 질문이 극한의 임계점에 다달은 순간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는지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배웠고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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