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폭력, 그 길들여짐에 대해서 본문

인 문/인 문

폭력, 그 길들여짐에 대해서

유쾌한 인문학 2011. 2. 11. 09:07
반응형




얼마전 1박2일에 양준혁이 나왔을때 참 인상 깊은 말이 있었는데 기억을 하실련지 모르겠다.  뭐 비단 양준혁 선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운동 선수라면 대부분 하는 말이다.  "안맞으면 불안하다."  타인에 의해 일방적인 육체적 고통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이게 정말 흥미로운 말이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현재 국민학교 세대인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매일 같이 학교에 등교하면 야구방망이로 맞는다.  처음엔 반발심을 가지고 이유를 따져보지만 사실 이유란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맞는다.  맨날 맞다보면 처음에 들었던 왜?라는 생각이 점차 사라져간다.  어차피 맞을꺼 빨리 맞자.  이런 생각이 들기에 이른다.  그러다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안맞으면 불안해진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성인이 되었을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조선놈은 맞아야 돼"  도대체 이게 뭔가?

사실 어려울거 하나 없는 부분이다.  짐승을 길들이듯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엔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권위에 맞서지 못하도록 때리면 그냥 맞도록 억압에 저항하는 의지 자체를 가지지 못하도록 그렇게 길들인다.  사실 어려울게 없는 부분인 것이 권위주의 군사정부의 탄생을 불러온 저항 자체가 학생들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좀 더 철저하게 밟아야할 필요성이야 다분한게 아닐련지.  군사정부 또는 권위주의 정부시절부터 자행되어온 이러한 문화는 사회 전체를 군대문화화 하는 현상을 가져 온다.  어떤면에서 보면 한국 사회는 전체가 군대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더 재미있는건 군대도 안갔다온 여자들 역시 이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군대문화와 폭력에의 길들여짐이라는 것은 사회 전반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의 상징이다.  폐쇄된 공간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지내게 된다.  공간이 내세우는 규율 그리고 그 규율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이 존재할 뿐인 이곳은 사회 체계가 내세우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적 측면과 정확히 일치하는 면이 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그 당대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와 가치체계를 의미하게 되며 이것은 사회체계 즉 교육 시스템이나 종교적 시스템을 통해서 철저하게 구성원들에게 교육되거나 주입되게 된다. 

재미있는건 이러한 사회 시스템을 지배하는 이면에는 독특한 도덕관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도덕이란 다양한 가치체계가 존재하게 해주는 최고 가치로서 우리사회의 도덕은 절대주의적 도덕관이다.  이러한 절대적 도덕관에서부터 다른 가치체계들의 해석이 이루어지고 그 가치평가에서 우리의 실천평가가 도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도출된 실천 평가는 기독교적 이원론에 입각한 선이라는 것의 절대적 복종 그리고 예수와 같은 삶의 추구 정도로 정리가 가능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기독교적 이원론에 입각한 절대적 도덕관과 그에서 도출된 실천평가라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관이라는게 얼마나 웃기는지 아시는가?  절대적 도덕관이 개개인에게 강요된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청렴결백에 대한 강요이다.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밑도 끝도 없이 높은 도덕성으로서의 청렴결백을 개인에게 강요한다.  물론 아무나 해낼 수 없는 그런 고매한 높은 도덕성을 해내어 청렴결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청렴결백한 사람이 가난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 자체가 바로 모순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절대적 도덕관을 만족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예는 무수히 많다.  겸손에의 강요.  절약에의 강요.  모든 것들이 불가능한 도덕성에의 강요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이 도덕성을 자신들은 지키지 못하면서 만약 타인이 행하지 못하면 가차없는 비난이 가해진다. 

결국 여기에서 간단한 공식이 도출된다.  높은 이상, 닿을 수 없는 현실 그리고 폭력이다.  끊임없이 유무형의 폭력을 가하면서 높은 이상에의 추구를 강요하지만 이는 가능하지 않다.  이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최고가치로서의 도덕이 무너지고 그 진리성이 의심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최고가치를 기반으로 한 다른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상실이자 끝없는 무의미함이 시작되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이 허무주의의 한 요소가 된다. 가치 붕괴와 모순에서 비롯되는 전반적인 허무주의는 사회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오직 폭력과 억압만으로 돌아가게 만들며 그 구성원 모두를 그 폭력과 억압에 길들여지게 만들게 된다.  복잡한듯 하지만 사실 어려울거 하나 없는 내용이다.  끊임없이 요구되는 개인을 향한 도덕성의 추구와 불가능.  나에게 주어지는 폭력.  반복되는 폭력에서 오는 길들여짐과 비판의식의 상실.  사회 전반에 만연하는 도덕성 상실의 확인.  폭력에의 길들여짐에서 비롯된 뭘 해도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  이것들이 종합되어 전체적으로 허무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지나친 전체주의적 사회양상의 수정.  즉 개인주의의 적극적 도입이다.  한국사회는 개인주의하면 무조건 이기주의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고관에서 한발짝도 못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직결되지 않는다.  이는 잘못된 초등교육의 결과로서 철저하게 세뇌된 결과물일뿐이다.  개인주의는 결국 니체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허무주의의 상황을 놓고 자신의 삶에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여 스스로 최고 긍정의 길을 걷는 것.  스스로 자의식을 변화시켜 스스로를 가치 설정자로서 변화시키는 즉 힘에의 의지에 대응하여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극복해나가는 지극히 이기적 인간으로서의 초월적 인간으로의 변화이다.

두번째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성향의 도입을 통한 구조의 적극적이고 이기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다.  왜 한국은 프랑스가 될 수 없는가?  이유는 의외로 자명하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프랑스는 의외로 쉽게 집단행동을 통한 사회변혁이 잘일어난다.  68혁명도 그렇고 최근에는 <분개하라!(Indignez vous!)> 라는 30페이지 소책자를 통해 큰 방향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 사회도 몇십년 전에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군사정부시절부터 길들여진 초등교육의 산물의 계층에선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즉 사회 전체의 흐름이 지독하게 보수적이고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동하지만 그 본질에 위치하는 것으로 결국 폭력과 길들여짐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상황이 여기까지 진행된 시점에선 변화는 더욱 요원하다.  철저하게 보수적이고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저들에게서 변화를 기대하긴 힘든 것이 사실이고 현재의 초등교육이 어떤식으로 진행되는지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딱히 다를거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유형적 물리적 폭력은 점점 사라지더라도 그에 못지 않은 무형적 폭력은 여전히 살아숨쉴테니깐 말이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