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 image or real

영화 큐브(1997), 구조주의 현대철학 본문

영 화/90's 영화

영화 큐브(1997), 구조주의 현대철학

유쾌한 인문학 2010. 7. 13. 20:01
반응형




큐브(CUBE)
빈센조 나탈리의 첫번째 영화이다.  워낙에 유명하니 특별히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워낙에 충격적인 영화인지라 시리즈가 나오기도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시리즈물들은 같은 작품으로 보기 힘들다.  문제는 영화적 주제와 완벽하게 무관한 음모론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상한 음모론은 영화를 유치하게 만드는 요소일뿐이다.  뭐든 헐리웃으로 넘어가면 대단히 유치해지는 현상.  제발 헐리웃은 능력이 안되면 손을 대지 말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일단 재미도 재미이지만 20세기를 휘감아돈 현대철학의 핵심적 정수를 영상화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말무렵 철학은 실존주의의 광풍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과 함께 정말 영원할 것 같았던 실존주의는 언어학의 발달과 러시아 형식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구조주의라는 새로운 사조 앞에 한방에 무너져내려버리게 된다.  소쉬르의 언어학과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의 연구에 힘입어 정신분석은 라캉이라는 인물의 등장과 함께 구조주의 정신분석으로 발전해나가게 되고 맑시즘은 알튀세르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길로 그리고 푸코의 등장으로 더욱 독특한 양상으로 진화나가게 된다.

물론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형식적인 구조주의 즉 주체의 죽음을 외쳐버리는 구조주의가 주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이론들 그 자체는 거대이론이라 불리며 영화미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구조주의와 정신분석 등으로 대표되는 이론에서 벗어나 인지주의의 발달과 보드웰이라는 학자의 등장과 함께 포스트-이론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두 이론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하게 된다.  그러다 쌩뚱맞게 97년도에 급작스럽게 이런 영화가 등장하면서 거대이론의 건사함을 보여주게 되니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아닐련지.  

영화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큐브는 가로 세로 높이 총 26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초 거대 구조물이다.  하나하나가 방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 방들은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러한 구조물안에서 사람들이 깨어나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그들은 왜 여기에 들어와있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탈출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이고 방 하나하나는 각종 함정이 도사리고 있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이다.  




랑그언어학
랑그언어학은 소쉬르가 연구한 언어학이다.  기본적으로 외부언어학이 사용하는 사적언어학으로서 통시성적 방법은 배제하게 되고 내적 언어학 즉 동시성적 방법을 통하여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소쉬르는 랑그와 파롤이라는 것을 구분하게 되는데 랑그는 체계를 뜻하고 파롤은 언어 사용을 뜻하는 개념어로 개인적 발화이자 체계의 구체적 실현이다.  랑그는 개개인이 따라야하는 언어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고 파롤은 랑그가 개인에 따라 자유롭게 실현되는 현상 그 자체이다.  랑그는 사람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법칙 및 체계로서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며 사람은 혼자서는 절대로 이 체계를 바꿀수도 만들수도 없다.  다만 이 체계를 사용할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한국어 문법을 개인이 혼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는 법칙이자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랑그이다.  이런 한국문법을 사용하여 우리가 말을 하는 것 그리고 시대에 따라 우리의 말이 바뀌는 변화과정 등 이런것들이 파롤이 된다.  

이러한 랑그는 기호들의 체계가 된다.  언어학에서 기호는 기표(능기)와 기의(소기)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고양이 라는 글자를 보자.  저 글자 자체는 기표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 고양이라는 기표를 보면 야옹 하는 동물을 떠올리게 되는바 기표에 담겨진 의미가 바로 기의이다.  그럼 기표와 기의의 연결에 무슨 필연성이 존재할까??  고양이라는 기표에 반듯이 야옹하는 동물이라는 기의를 결합해야할 당위는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냥 이는 약속일뿐이다.  그리고 기호는 체계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쉽게 말하자면 고양이가 고양이가 되기 위해선 다른 개나 코끼리, 쥐 등등 따위들과의 관계에 따라 가치가 부여된다.  결국 기호가 체계안에서 다른 기호들과 구분된다는 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론은 다양한 분야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된다.  즉 보통 기표는 청각적 이미지로서 그려지기 마련인데 요즘은 다양한 형태의 소리, 영상, 꿈, 도표, 행간 등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결국 기호가 체계안에서 다른 기호들과 구분된다는 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호가 가지는 의미는 기표와 기의사이에서 발생하고 이는 기호=기표/기의 로 그릴 수 있다.  중간의 횡선은 둘사이의 관계를 뜻하며 이러한 관계는 사회적 약속 또는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가 된다.  수많은 기호들이 상대적 관계에 의해서 그 의미가 부여되고 상황에 따라선 그 의미 자체가 은유되기도 한다.  

이와 동시에 이해해야 할 것이 야콥슨의 분류이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연쇄체와 계열체적 특성을 구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철수는 글을 쓰고 있다'라는 문장을 보았을때 연쇄체적 관계는 통사적 관계(문법구조)를 의미하게 되고 계열체적 특성은 '철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라는 문장에서 철수는 영희로 치환이 가능하고 소설은 시로 치환이 가능한 이러한 관계를 의미하게 된다.  결국 계열체적 관계는 문장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치환가능한 용어의 존재를 통해 성립이 가능하게 된다.  결국 연쇄체적 관계는 현전성의 관계이며 계열체적 관계는 부재성의 관계이다.  

이를 두고 야콥슨은 환유(연쇄체)와 은유(계열체)라고 각기 칭하게 된다.  환유는 상호인접하여 근접 연결되어 있는 성질을 가지며, 은유는 현전적으로 연결도는 근접 연결은 아니지만 유사성에 의해 상호 대체되는 성질을 말하며 대체되어도 언어의 사고체계가 흔들리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예컨대 환유는 철수는 시를 쓴다에서 철수라는 주어는 쓴다는 동사를 통해 시와 인접하여 연결되며 다른 예로 상의 라고 했을때 이는 하의와 의복 전체에서 근접 연결을 가진다.  은유는 철수라는 주어는 영희로도 대체가 가능한바 영희는 현전하여 근접하진 않지만 부재적 유사성에 의해 상호 대체가 가능한 것이 은유이다.  이러한 은유는 하나의 개념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는 행위이므로 선택축으로서의 계열축에 상응하고 환유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을 연상시키거나 그것에 인접해 있으므로 인접관계이므로 이것은 결합축(연쇄체)으로서 기능한다.

은유와 환유라는게 상당히 이해하기 난해한 것인데 핵심은 은유의 부재적 유사성과 환유의 현전적 인접성에 존재한다.  즉 은유는 둘 이상의 언어들 사이의 부재적 유사성을 통해 연상작용을 행하여 한 단어 대신 유사한 다른 용어를 선택할 수 있는 대체 작용을 말한다.  반면 환유는 현전한 문맥속에서 상호 연결된 관념을 취하는 작용을 말하며 이는 전체에 대한 부분의 취함, 내용물에 대한 겉모습의 취함, 결과에 대한 원인의 취함 등으로 표현된다.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야콥슨의 실어증을 확인하는 것이다.  야콥슨은 실어증은 두가지 종류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계열체적 유사관계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은유적 실어증과 둘째는 결합체적 인접관계를 결합시키지 못하는 환유적 실어증이다.  은유적(계열체) 실어증의 경우는 은유적 관계에 있는 단어를 "대체"시키지 못하는바 '가르침'이라는 단어에서 '학습'이나 '교육'라는 것을 연상시키지 못하게 되며 '처녀'라는 단어를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것으로 대체 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환유관계에 대한 능력은 문제가 없어 담배를 보고 담배 연기를 "인접"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반대로 환유적(결합체) 실어증의 경우는 기본 단어를 복잡하고 광의의 의미의 단위로 결합을 못시키지만 은유 그러니까 부재하는 연상작용은 잘해내게 된다.  

이러한 특징은 외연과 암시적 의미라는 용어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예컨대 파브라는 티비를 산다고 했을때 파브라는 티비는 그 상품의 외연을 이루지만 암시적 의미로서 이는 삼성이 만들었기에 어느정도 믿을 수 있다는 암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람보르느기니와 포르쉐를 구입한다고 했을때 이의 외연은 스포츠카를 산다는 것이지만 이의 암시적 의미는 상류층을 뜻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구조주의 언어학은 변별적 차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진다.  

 




큐브와 구조
큐브라는 구조물에서 26개라는 숫자는 알파벳 숫자를 의미하게 된다.  26개의 알파벳이 세축으로 제시되면서 하나의 초거대 구조물이 형성되는 식이다.  더욱이 영화 내에서는 각 방의 안정성을 확인 하기 위해 방 문에 붙어 있는 기호들을 이용하여 해석을 하여 안전성 여부를 판단하여 움직이는 양상도 보여주게 되는바 이러한 요소와 26개라는 숫자가 만나게 되면서 거대한 언어 체계를 부여하게 된다.  즉 영화속에 나오는 큐브라는 구조물 자체가 하나의 언어체계라는 점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우리가 언어적 체계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냥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적 체계는 인간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요소를 가지게 된다.  즉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큐브속에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극중 주인공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점이다.  언어는 하나의 거대한 인식의 틀로서 작용하게 된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체계라면 그 체계는 수십만가지의 기호들의 상대적 관계로서 규정되는 것이고 그속에 존재하는 기호들은 일종의 담론의 구성체로서 의미가 규정되게 된다.

즉 일종의 매트릭스라고 볼 수 있는바 매트릭스는 하나의 거대한 인식의 틀이 된다.  그 틀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매트릭스는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 내부의 프로그램들처럼 매트릭스 내부의 객체에게 목적을 부여한다.  그 부여된 목적을 통해 우리는 그속에서 나의 존재 이유를 찾곤 하지만 결국 매트릭스가 부여한 목적에 불과하다.  구조가 무서운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구조속에 속해 있지만 그걸 느끼지도 못하고 인지하지도 못한다.  구조속에서 나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구조속에서의 선택에 불과하다.  이러니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란 큐브속의 자유에 불과한 것이고 자유의지라는 것도 큐브속의 의지에 불과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니 결국 구조속에서 주체는 사라지게 된다.  즉 우리는 존재한다기 보다는 존재당해진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러한 결론에 반발하여 이 틀안에서 새로운 시도가 생겨나고 있는 형국이다.  너무 이렇게 극단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네 삶이 너무 비극적이지 않을련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구조속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탈출할 수 있는 방법으로 27번째 방 즉 완전한 구조인 큐브에서 딱 하나 튀어나온 공간을 상정하여 그곳을 통하여 탈출할 수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27번째 방은 큐브내의 모든 방이 언젠가는 들리게 되는 그런 성격의 방이다.  이 방은 기호체계에서 완전하게 무관한 방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런게 존재할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절대로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언어체계에 완벽하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유일하게 탈출하는 사람은 언어체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폐증 환자뿐이다.  

정리하자면 큐브라는 건축물이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속에 있는 인간은 강제적으로 그 체계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주체는 사라진다.  인간은 체계속에 속해 있고 구조가 만들어내는 인식의 틀에 갇혀 사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결국 주체는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코키토적 자율적 존재라기 보다는 다양한 담론 구조들의 통과하는 통로이자 효과에 불과하게 된다.  흔히 하는 말로 프레임이라는게 있다.  사람의 머리속에 꽉 박혀 있는 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빨간 안경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이는 것이고 파란 안경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데 이 안경이 바로 프레임 또는 담론 또는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코키토적 주체는 내가 생각하고 고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만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는 생각하는게 아니라 담론이라는 거대 구조에 의해서 생각 당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주체 모델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구조가 개인의 주관을 너무 파괴하여 아무런 주체성도 남기지 않게 되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주체모델은 코키토식 주체모델과 다를바 없이 또다른 인간소외를 불러온다.



구조와 훈육
큐브라는 영화가 시리즈로 나아가면서 뭔가 2부터 어떤 절대권력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늬앙스를 풍겨내기 시작하는데 이건 영화에 대한 이해가 아예 없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결과들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이라고나 할까?  구조는 철저한 체계일뿐이다.  그속에서 절대권력이라는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절대 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체계가 아닌 피라미드일뿐이다.  구조에서 중요한건 구조에 의해 길들여지는 훈육과 내부 구성원 서로가 그 체계를 이용하여 행하게 되는 권력관계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훈육의 특징은 어떠한 절대권력이 존재하여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 관계의 그물망속의 내부권력관계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점이다.  위계질서라는 특정한 감시시스템을 통해 행사되는 이러한 권력은 아주 기계적이면서 항구적이고 자신도 모르게 이 기계 시스템속에 우리 스스로가 속해있으면서 권력을 분유한채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거대하나 문법안에서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여기다 대고 급작스럽게 거대권력 이런 시각을 드리대버렸으니 영화가 망가질 수 밖에 없는것 아니겠는가?  사실 따지고보면 현실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거대 권력?  거대 음모?  그런건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 당신을 억압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당신도 만만찮게 그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을 억압하고 있지 않은가?  괴물이 등장하여 이 체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체계가 바로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걸 이해 못한다면 영원히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반응형
49 Comments
  • 이전 댓글 더보기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