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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재자(1940), 독일안의 이성과 광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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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재자(1940), 독일안의 이성과 광기

유쾌한 인문학 2010. 8. 12.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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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찰리 채플린이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계실터 그 작품이 바로 위대한 독재자이다.  장편영화만을 기준으로 놓고보았을때 바로 전작품인 모던 타임즈의 급진성과 비판정신으로 인해 당시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된 그가 오랜만에 돌아와 내놓게 되는 장편영화이다.  뭐 그래봐야 4년이지만 말이다.  영화 내에서 침공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 이 영화가 나온것은 40년이다.  이미 폴란드 침공을 예감한 선견지명이라고 해야 할까? 

채플린은 이 작품에서 1인 2역을 맡게 된다.  바로 순진한 이발사와 독재자 힌켈이다.  단순하게 보면 1인 2역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하나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양면적 성향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된다.  꼭 인간 주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양면적 성향 역시 그대로 징표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연설 장면에서 둘은 만나게 되는데 힌켈의 모습을 한채 외치는 이발사의 자유와 평화의 메세지는 결국 동일성안에 존재한느 다름의 발현의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주게 된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1차대전에 참전하였던 유태인 이발사는 슐츠라는 장교와 함께 살아나게 되고 부상이 심해 병원에 꽤나 오래 입원하게 된다.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오는데 불황이 닥치면서 이발사와 똑같이 생긴 힌켈이라는 독재자가 등장하여 정권을 잡게 된다.  그때즈음 이발사는 퇴원하여 자신의 본업인 이발소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미 자신이 거주하던 곳은 게토로 지정되어 있는 상황이다.  상당히 탄압이 심한 상태인데 1차 대전 당시 자신과 함께 탈출한 장교인 슐츠를 만나게 되어 보호받게 된다. 

한편 독재자 힌켈은 유태인 갑부에게서 돈을 빌리려고 잠시 게토 탄압을 멈추지만 실패하게 되자 더 극심하게 탄압하게 되고 이에 반발하던 슐츠 마저도 수용소로 보내버리지만 슐츠는 탈출한다.  이때 옆나라인 박테리아 국의 독재자인 나폴리니가 자신이 침략하려고 했던 오스텔리히를 침략하려고 하자 나폴리니를 불러들여 회담을 열게 된다.  한편 슐츠와 이발사는 붙잡히게 되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고 어느시점에 둘은 군복을 입고 탈출하게 된다.  힌켈과 똑같이 생긴 이발사를 힌켈로 오해한 군인들 앞에서 이발사는 희망과 평화, 휴머니티에 대한 연설을 하게 된다.




독일안의 이성과 광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파우스트부터 시작해보자.  파우스트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2부 마지막 부분이다. 
파우스트는 왕을 도와 공을 세우게 되고 그리하여 일정 정도의 땅을 하사받게 된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이 땅을 간척하게 되는데 쉽게 말해 자연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결국 그는 엄청난 제방공사를 감행하게 되고 이를 위해 백성들의 노동력을 무지막지하게 짜내서 결국 이를 완성하게 된다.  이 순간 파우스트는 만족감을 얻게 된다.  만족을 얻었으니 악마는 그의 영혼을 거두려 하지만 이때 천사들이 내려와 파우스트를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는 저 공사를 쉽게 이루어내진 못했다.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말그대로 쥐어짜낸 것이다.  심지어 어떤 집이 공사가 방해가 되자 이를 없애려고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 집에 살던 노부부가 불에 타 죽는 사건도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의 욕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자연과 신에 맞서고자 하는 근대 이성에 대한 확신은 파우스트의 구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에 대한 확신은 대중에 대한 계몽으로 이어지게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단순히 명작이라 하여 칭송할 수 만은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측면때문이다. 

이성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이다.  객관적 이성은 객관적 현실에 내재하는 합목적적 이성과 그걸 파악하는 주체의 능력을 동시에 가리키는 용어이다.  객관적 이성을 지향하게 되면 수단보단 목적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럼 주관적 이성은 무엇인가??  주관적 이성이란 추론이나 영역 따위의 능력을 의미하는 개념어인바관적 이성은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에만 관심을 가지는다.  이는 역시 데카르트의 코키토 이후 나타나게 된 현상으로 인간을 중심에 세우고 주체가 중심에서면서 자기 보존이나 자신의 유용성이나 이득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 이성의 지배를 받던 시절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나 도덕 등 다양한 중세적 가치관들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 주관적 이성이 전면화 되면서 계몽의 역할이 야만성을 줄이기는 커녕 야만성을 더 늘리는 웃기는 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주관적 이성은 수단에만 관심을 가진다.  무슨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정도냐면 노예제도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용성이 입증 된다면 아주 합리적인 제도가 된다.  여성에 대한 탄압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용하다면 역시 합리적이게 된다.  이는 자연파괴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현재를 보자면 경기를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건설로 운하를 파는게 유용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역시 합리적이게 된다.  이게 바로 도구적 이성이다.  

이러한 이성의 지배를 받는 근대.  저러한 계몽의 정신.  이성의 빛에 대한 믿음과 과학의 발전은 과연 근대를 빛나게 밝혔던가?  현실은 정말 시궁창이었다.  두번의 전쟁.  대학살.  이성은 변질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이성의 폐단이다.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데카르트적 주체에 인간이 아닌 국가나 민족을 세우게 되었고 그로 인해 2번의 대전쟁과 대학살을 통해 인간 자체를 도구화 시켜버리게 된다.  결국 극심한 인간소외를 불러오게 되었다.


하지만 저러한 이성의 변질만으로 독일의 광기를 설명하기는 뭔가 부족하다.  독일의 광기를 설명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였겠는가?  아시다시피 도이치 사람들은 거대한 도이치 국가라는 것을 가진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작은 도이치 국가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30년 전쟁을 통해 뭉칠 기회도 자꾸 잃어만 간다.  유럽의 한복판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주변국가들은 강력한 통일국가를 형성해나가는데 도이치 나라들은 맨날 고만고만한 꼬맹이들 모여서 동네싸움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가가 존재하긴 했지만 역시 도이치라는 큰 틀에서 본다면 주변국가들에 비해서 많이 뒤쳐졌다고 보는게 맞다.  이때즈음 해서 괴테가 탄생하고 나폴레옹 등의 위협을 통해 도이치 통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나오게 되며,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도 활동을 하고 조금 더 있다 브람스와 바그너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우리가 확인할 부족한 1프로는 분열된 독일과 그 하에서 나타난 예술이다.
 

먼저 낭만주의를 봐야 한다.  18세기 즈음 하여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토대가 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문학의 영향에서 맞서기 위해 도이치적인 것을 찾는 것에 주력하게 된다.  계몽사상이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남을 가리키는거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아주 틀린건 아니지만 아주 맞는것도 아니다.  계몽이란 비이성적인 것의 배제를 말한다.  즉 미신이나 종교 그외 비합리적인 이해할 수 없는 관습따위의 배제를 뜻한다. 

결국 도이치도 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도이치는 뭔가 구심점이 되는 나라도 없고 같은 말 쓴다는거 말고는 딱히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인지라 이성 중심의 계몽이 아닌 예술, 종교, 신비주의까지 아주 그냥 두루두루 건들게 된다.  도이치 지성인들의 목표는 철저한 이성중심적이 될 수가 없었다.  일단 하나로 뭉쳐야할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 도이치적인 것을 찾고 이에 몰두하기 시작하게 된다.  각종 민담이나 도이치어 문법책도 나오고 그림 형제는 사전도 펴낸다. 


이제 정리해보자.  독일 광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근대의 합리적 이성의 태동과 그것의 도구적 이성으로의 변질이 첫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이 가지는 특유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의해서 만들어진 낭만주의적 예술 사조와 이 사조가 만들어낸 바그너의 신화적 웅장함을 가진 오페라 음악들이 두번째 이유가 될 수 있다.  이것들이 도이치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는 원형을 건들게 되었고 이것이 타민족 또는 타 국가에게 투사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 바로 독일의 광기이다.




유대인 학살
사람이라는 동물은 어느 누구나 똑같다.  두개의 눈을 가지고 두개의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다.  생식하는 방법도 동일하며 먹고 자고 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렇듯 태어날때부터 동등하게 벌거벗은채 태어난 인간은 그 후 다양한 기준에 의해서 인간을 구별짓게 된다. 작게는 가족에서 크게는 국가까지 그 방법은 다양하다.  결국 인간을 구별짓는 것은 어떻게 무리짓는가.  즉 집단 형성의 기준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리고 하나의 집단과 그외의 모든 집단은 배타적 관계를 이루게 되는바 바로 이 지점에서 유대인의 상징성이 도출된다.  즉 인간이라는 집단과 유대인이라는 상징적 인간집단의 '다름'이다.

당시 유대인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뚜렷하게 대조되는 두가지로 표현된다.  하나는 돈이나 아는 벌레와 같은 아주 경멸의 대상으로서의 태도이며, 다른 한가지는 유대인의 돈과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서 행하는 은근한 경외로서의 태도이다. 이러한 경외로서의 태도는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한 태도를 정당화시켜주는 요소로서 작용하게 되며,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서 전체주의적 요소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유지하기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소극적 환상의 개념적 요소가 필요하게 되는바 이것이 바로 타자에 대한 과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타자를 소외시키는 과정은 타자의 권력에 대한 과장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중과정이다.쉽게 말해보자면 사실 유대인이라는 집단이 전부다 부자일리도 만무할테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이라는 인간상 역시 존재하지 않은 허상의 것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전형성은 굳이 갖다붙이면 모든 인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그들을 개념지은 인간의 상상적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구조의 문제이지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마무리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파시즘이라는 현상 하나만 놓고 나오는 연구서들만 해도 권당 천페이지는 우습게 넘어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간략하게 살펴보는건 가능한 것이고 어떤 공통점을 추출해내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집단에 대한 맹목적인 광신과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도출되는 공격성 그리고 근원에 대한 집착 마지막으로 뛰어난 연설가이다. 

오늘날 한국을 보자면 지독할 정도의 집단적 사고방식과 이원론에 입각한 사고관.  거기에 근원과 원조에 대한 집착 역시 상당하다.  심지어 자신이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 한국인이라는 소름끼치는 망언을 서슴치 않게 해대고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그러한 발언에 그 어떤 문제점도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  현대적 개념의 소급을 통한 끝도 없는 원조에 대한 집착.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인종 차별주의 국가.  거기에 내부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상정되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적에 대한 공격성과 그것에 대한 철저한 실천.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 부재. 

사실상 토양은 아주 충분하다 못해 비옥할 지경이며 공격성의 강도는 더욱 심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이렇게 흐르면 여론의 방향을 조작하는 것이 상당히 쉬워진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집단을 끊임없이 창출하고 그들에게 각각의 집단에게 또 다른 가상의 집단을 제시하여 공격성을 돌려 버린다.  사회 전반에 흐르는 이원론은 지속적인 분류를 강요하고 이렇게 형성된 분류는 만들어진 허구의 집단을 단순하게 규정한다.  이렇게 되면 본질은 사라지고 공격성만 남게 되며 사회 전체가 공격성을 띈 가상의 개별적인 것으로 파편화되어 흐릿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이 안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생존은 지속적으로 가능해진다.  

이러한 체계성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그 체계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게 되고 그렇게 강요된 체계는 골수까지 박힌채 그 안에서 사고를 하기에 명확한 한계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가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기술문명은 발전하고 절대적 부의 총량은 나날이 늘어만 가지만 어째 인간은 나날이 미개해지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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