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환상으로의 도피

  타인의 꿈 속에 들어가 생각을 훔쳐낼 수 있는 먼 미래 사회.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최고의 꿈 보안 설계자이자 생각을 훔치는 도둑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수배자의 신세이기도 하다.  코브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기억을 훔치며 살아간다.  그가 원하는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날 수 없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코브는 사이토(와타나베 켄 분)에게서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받게 된다.  인셉션을 해달라는 것이다.  인셉션은 기억을 훔치는 것이 아닌 기억을 심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토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경쟁사의 사장이 곧 숨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회사를 물려받는 아들인 피셔(킬리어 머피 분)가 회사를 분할시키는 생각을 품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코브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수배를 풀어버리는 것을 제안한다.  코브는 이를 받아들인채 인셉션을 위한 최고의 팀을 꾸린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발견한 것은 의심하는 의식 활동자로서의 나의 존재이다.  이러한 일체의 의식활동을 사유라고 부르게 되고, 의식 활동 주체로서의 자아의 확실성은 "코키토 에르고 숨"으로 표현된다.  이것의 의미는 나의 사유와 나의 존재가 별개의 사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나의 사유 활동으로 확인되기에 나의 본질은 바로 사유가 된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발견한 자아이다.  근대적 주체는 자기투명성을 가지는 주체이다.  자기투명성이란 내가 내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채 그 어떤 것도 나의 사유와 인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독립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는 주체성을 가지며 모든 것은 나의 책임아래에 있고 나의 통제 아래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 중심의 동일성 주체는 무의식이라는 이름 하에 철저히 무너진다.  정신분석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흔히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의식을 조종하여 자발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알고보니 의식은 무의식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관으로 인해서 데카르트 이후로부터 내려온 자아철학은 무너져내리게 된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되어진다."는 명제에서 알 수 있듯 의식은 무의식의 효과에 불과하지만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믿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영화내의 기본적 설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억을 훔치는 것과 기억을 삽입시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핵심적 주제는 바로 기억과 주체성의 문제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서 구성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이름, 학적, 직장, 주소, 국적 등을 통해서 인간은 구성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하나의 주체가 구성되기 위한 형식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필요한 것이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쌓아올리게 되는 실체적 요소인 기억을 들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의해서 불려지는 다양한 기호와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한 기억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기억이 조작가능한 것이고 나의 기억이 조작된 것임을 모른다면 난 과연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일까?

  기억과 존재의 문제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또 다른 작품인 메멘토에서 이미 한번 언급되었다.  주인공인 레너드(가이 피어스 분)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상태로서 기억이 10분이상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 기억마저 사라진건 아니다.  언어를 사용한다거나 운전을 한다거나 그외 일상 사회생활에 근간이 되는 지식들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레너드가 단기 기억만을 가진채 살아가는 이유는 어떤 사고 때문이다.  그 사고로 인해서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가 가진 마지막 장기기억은 부인의 죽음이다.  부인이 어떤 괴인에게서 성폭행 당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그는 10분의 기억에 의존한채 부인의 복수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그는 메모에 의존한다.  지속적으로 메모를 하고 중요한 정보는 몸에 문신을 새겨서 혼자 수사를 하고 자신의 부인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레너드라는 사람은 과거 어느 순간까지의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로서 기본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그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그는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극중 주인공인 레너드에게 있어 자신의 부인이 강간당해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복수는 대단히 중요해진다.  자신의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되니깐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레너드가 가진 마지막 기억이 잘못된 기억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살해는 당하지 않았다.  도리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편 때문에 고통받으며 살아가다 스스로 자살해버린 것이다.  레너드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설사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채 10분만 지난다면 그는 다시금 살아갈 이유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너드는 잘못된 기억에 의존한채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는다.  비록 자신이 임의적으로 왜곡해버린 기억이긴 하지만 그 기억에 지배당한채 살아가는 것이다.  레너드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측면이 전혀 없다.  오직 왜곡된 기억의 지배에 사로잡힌채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라캉의 거울단계는 주체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혁명과도 같은 관점을 가져오게 된다.  거울단계[1]는 언어를 배우지 않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에게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거울단계의 진입 이전의 아기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기에 자신의 신체가 파편화되어있다는 원초적 환상을 가지게 되며, 그와 동시에 자신과 대상을 구분하지 못한채 모든 것이 뒤엉켜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게 되고 그 이미지를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거울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불완전한 신체를 자기라고 생각하기보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기라 생각하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즉 이미지에 매료되는 것이며 이러한 전체성의 경험은 상당한 쾌락을 가져오게 된다.  나르시스 신화는 이러한 거울단계를 잘 보여주게 된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애정을 품는 나르시스의 모습이야 말로 거울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이때의 아이는 자신을 이미지와 동일시한 채 이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여기는 환상을 가지게 되며 이를 이자적 구조의 세상이라 칭한다.  이는 상상적 합일의 세상으로 무엇하나 내마음대로 안될 것이 없는 완벽한 이상적 세상이다. 

  라캉이 거울단계를 통해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에 의해 존재 당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의 욕망이 아닌 타자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하다.  이렇듯 타자에게 의존적인 인간의 모습은 최초로 자아를 구성하는 거울단계에서 이미 확인이 되는 것이다.  자아는 이미지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므로 인간은 왜곡될 수 밖에 없으며 그 존재의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나’는 의식적 자아가 아닌 무의식에서 찾아야한다.  레너드의 자아 역시 왜곡된 기억에 의존하여 발생한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모호한 존재성은 영화 인셉션에서 더욱 극적으로 제시된다.  인셉션이란 기억을 삽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속 가장 깊숙한 곳에 생각의 단초를 심어 그 단초가 그 사람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부분이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이다.  영화상에서 기억이 심어진 자는 절대로 심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된다.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기억의 단초가 완벽하게 심어져야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즉 그 단초로 인해 주체가 새롭게 성립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단초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알튀세르는 사회주의 혁명 이론 이전의 모든 철학ㆍ사상ㆍ정치ㆍ경제 제도가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흔히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회 체계의 유지를 위한 허상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은 자유로운 주체이며 자유선택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는 실체로서 믿게 한다.  여기에 단 한치의 의심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면에 존재하는 구조 자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온갖 규범들과 상식 그리고 정상이며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 이러한 규범적 요소들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하나의 단초가 되어 인셉션 된다.  어쩌면 우린 모두 인셉션 당했다고 볼 수 있다.

  생각의 단초는 일종의 기호로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빨간색은 과거 상당히 안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빨간색만 보면 빨갱이와 공산당이라는 어떤 연쇄적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빨간색이라는 기표 아래에는 북한이라고 하는 숨겨진 기의가 존재하며 이것들은 환유적으로 좌파, 공산당, 평등 따위의 결합하면서 안좋은 이미지로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 한국의 현실일뿐이며 외국에서 빨간색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빨간색은 빨간색일 뿐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기호는 그 사회의 언어 체계 속에서 상대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러한 언어체계를 내재화 할 때 현실의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되며 이 순간 인간은 주체를 정립하게 된다.  이것이 상징계의 역할이다.  상징계는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 체계로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선험적인 성격을 가지며,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회생활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상징계에 종속되어야 한다.  주체는 상징계에 의해 구성되며 이미 존재하는 그 구조에 갇혀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매트릭스 내의 세계와 매트릭스 바깥의 실재로 양분된다.  매트릭스 내부의 세계는 컴퓨터로 프로그램화된 온갖 기호들의 조합물로서 컴퓨터 프로그램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면 매트릭스 내의 세계는 상징계적 세계에 불과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역시 매트릭스의 세계와 같이 언어로 구조화되어있는 상징계적 세계이며 우리는 이 상징계적 세계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게 된다.

  영화 인셉션에서 등장하는 꿈의 구조의 설계는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 무의식의 구조를 가리킨다.  모든 인간은 언어 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각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하는 다양한 기호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꿈의 설계는 각 개인이 일생동안 경험하면서 형성해온 나름의 체계를 최대한 본따야 한다.  사이토가 원하는 것은 피셔의 마음 속 싶은 곳에 어떤 단초를 심어 그의 마음 전체가 바뀌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선 먼저 피셔에 대해서 모든 것들을 연구하여 피셔의 투사체들이 눈치채기 힘든 정교한 꿈의 설계가 이루어저야 한다.  극중에서 투사체라 불리는 마음속의 사람들은 죄의식, 열등감, 공격성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이다.[2]  이에 마음 속에 있는 투사체들은 내가 편견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내가 A라는 사람을 거짓말이나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나의 꿈에서 A는 거짓말쟁이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현실의 A가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어디까지나 내머리속에서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타인이 나의 마음 속에 들어와 있기에 숨기고 싶은 생각과 감정들을 들킬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억을 훔치러 들어간 이들은 특정한 정보에만 관심을 가지겠지만 마음은 자신의 내밀한 비밀을 들키기를 원하지 않기에 투사체들을 통해 침입자를 죽이려든다. 

  피셔에게 주입하고자하는 기억의 단초는 총 3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아버지는 내가 당신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무언가 이루기를 바란다.  둘째 나는 무언가를 스스로 이루어 보겠다.  셋째 아버지는 내가 자기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3단계의 단초들은 철저하게 피셔의 삶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피셔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상당히 안좋다.  어렸을때는 괜찮은 관계였던것 같은데 피셔가 성장한 이후부터는 아버지는 아들을 경멸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관계가 형성되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피셔의 개인적 욕망이자 기호이다.  어쩌면 피셔는 자기를 자랑스러워하고 스스로의 길을 걷고자 하는 아버지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즉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아버지를 극복하여 아버지와 같지만 다른 길을 걷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이성의 논리에 따르는 사업에서 이런식의 감상적인 태도가 허용될리가 없다.  이에 이성을 뛰어넘는 아주 강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감정을 피셔의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야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와의 화해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처음엔 아버지의 부정, 아버지와의 화해 끝으로 아버지와의 동일시로 나아간다.  아버지가 나를 경멸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단계에서 어떤 감정적인 이해를 통해 아버지와 화해하게 되고 그를 통해 아버지와의 동일시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지점에서 피셔에게 행하는 인셉션의 핵심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끌어내 동일시로 나아갈때 그 동일시는 단순히 아버지가 이룩한 것을 유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피셔는 회사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기에 사이토가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도리어 동일시는 아버지와 같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아버지를 계승하는 것은 아버지가 이룩한 것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닌 아버지와 같이 창조적이고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인셉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셉션의 과정이 결코 순단치만은 않다.  코브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코브의 부인인 멜(마리옹 꼬띠아르 분)이 지속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코브는 아주 큰 죄책감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코브는 멜과 함께 꿈을 연구하다 가장 깊숙한 곳인 림보에 이른다.  그곳에서 그들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무엇하나 원하는대로 안될 것이 없는 완벽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내가 건물을 짓고 싶으면 건물을 지으면 된다.  내가 집을 사고 싶으면 그냥 가지면 되고 내가 변호사가 되고 싶다면 그냥 할 수 있다.  즉 완벽한 나만의 제국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꿈이며 환상일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환상은 너무나도 달콤하다는 것이다. 

  영화 쿵푸팬더를 보면 이러한 환상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항상 쿵푸 고수가 되기를 꿈꿔왔던 팬더.  그는 자신의 영웅인 무적의 5인방 피규어를 매일 같이 바라보며 무적의 5인방을 거느려 악당을 물리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상상 속에서 팬더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으며 중국 대륙 최고 고수라 일컬어지는 무적의 5인방마저 팬더에게 존경을 보낸다.  이러한 상상 속에서의 팬더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꿈이라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는지라 그 순간만큼은 완벽한 나의 모습에 빠져들기도 하고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완벽한 나의 세상에서 만족감을 얻은 채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 이런 상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해본적이 있을 것이고 상상에 빠져 허우적되는 경험 역시 한번쯤은 해보게 된다.  머리 속에서 펼쳐지는 완벽한 나의 모습에 쾌락을 느낄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에서 끝날뿐 꿈 속에서의 짧은 만족은 현실로 돌아오면서 사라지게 된다.  이때 인간이 보여주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상상속의 나에게 집착하여 그 완벽에 가까운 나의 모습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과 현실속에 존재하는 나를 직시하면서 나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현실을 살펴보면 의외로 전자의 경우를 상당히 많이 발견 할 수 있다.  인간이 상상속의 나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현실의 주체인 나를 부정하게 된다.  즉 스스로를 극복하고 초월하여 그 꿈을 이루어낼 용기가 없기에 다른 것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며 그러한 측면의 대표적인 현상이 각종 도박, 마약, 시험 따위의 중독인 것이다.

  영화 인셉션에서는 꿈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강한 안정제를 맞아 꿈속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이 꿈은 그 어떤 마약보다도 더 강력한 만족감을 선사해준다.  림보에 빠져든 코브와 멜 역시 그곳에서 만족감을 얻으며 살아가지만 이내 코브는 그곳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멜은 환상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든채 진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할때 진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바로 토템이다.  멜의 토템은 작은 팽이였다.  만약 그곳이 꿈이라면 팽이는 멈추지 않고 영원히 돌게 된다.  하지만 멜은 팽이를 돌려 진실을 확인하려기보다 도리어 멜은 팽이를 금고안에 숨겨버린다.  토템을 눈앞에서 치워버린다면 더이상 그곳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의심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메멘토에서 레너드와 다를 것이 없는 태도이다. 

  림보에 갇혀버리는 현상은 경계설정의 붕괴로 바라볼 수 있다.  즉 거울단계와 언어활동을 통해 생성되는 주체가 붕괴되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붕괴는 나르시즘이 가지고 있는 붕괴와 매료 사이에서 더욱 부각되게 된다.  나르시즘은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이라 볼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자신의 이미지를 통한 자기 도취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다시 억압된 무의식의 자신의 신체에 대한 파편화된 소외가 떠오르며 자신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르시즘은 도취와 소외의 중간에 서있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코브는 현실로 돌아가길 원한다.  현실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에 코브는 금고 속에 멜이 감춰둔 팽이를 돌려버린채 금고를 닫아버린다.  그뒤 멜은 코브의 설득에 못이겨 그 팽이를 다시 보게 되고 그때 그곳이 현실이 아님을 받아들인다.  코브는 멜에게 “지금 우리가 있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다.”라고 인셉션을 한 것이다. 

  문제는 림보 단계에서 시행한 인셉션이 멜의 마음 전체를 지배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바이러스처럼 퍼져 그녀의 마음을 지배한다.  그녀는 현실로 돌아와서도 그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단초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멜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자살을 해버린다.  그녀가 생각한 현실은 꿈이었고 현재 속해있는 현실은 꿈이 되어버린 것이다.  코브의 마음 속에 담긴 그림자는 바로 이것이다.  부인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코브의 그림자는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하다.  코브는 자신의 그림자를 엄격하게 구조화시켜 단계별로 억압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오직 꿈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코브는 더이상 자연스러운 수면을 통해 꿈을 꾸지 못한다.  항상 약물을 이용하여 꿈 속으로 들어가야하는 것이다.  코브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서성이는 인물이다.  자칫잘못하면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아주 위험한 꿈에의 중독인 것이다. 

  피셔에게 인셉션을 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6명이 팀원들은 꿈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피셔는 이미 마음속에 보안장치를 설치해놓은 상태였다.  이에 1단계 꿈에서 사이토가 총에 맞게 된다.  보통의 경우는 꿈 속에서 죽게 되면 바로 깨어나지만 이번 경우는 3단계 꿈까지 들어가기 위해 강력한 안정제를 썼기에 킥 외에는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일행은 원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한다.  일단 2단계 꿈과 3단계 꿈으로 진입하여 시간을 연장시켜보지만 결국 사이토는 림보에 빠져든다.  피셔 역시 3단계 꿈에서 멜에게 총을 맞아 림보로 빠져든다.  코브는 이둘을 림보에서 꺼내와야 한다.  실패한다면 현실에서 그는 미국에 도착 그 즉시 영원히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물론 림보에서 탈출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4단계의 꿈속으로 들어갈때 코브는 말한다.  “피셔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아마 멜이 피셔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멜은 내가 그곳으로 오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틀린 말이다.  정확히는 코브 스스로가 그곳에 가 환상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욕망에 휩쌓여있는 것이다.

  그렇게 코브는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 분)와 함께 스스로 림보로 빠져들어간다.  그곳에서 코브는 다시금 멜을 만난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 속에서 코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멜은 달콤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너의 현실은 바로 이곳이다.  네가 현실이라고 믿는 바깥 세상은 수많은 경찰들로부터 쫓기는 현실이다.  차라리 이곳을 선택해라.  이곳에서 나와 함께 평생 늙어가면서 살아가자.  우리의 아이들이 저기에 있지 않느냐. 가서 아이들을 안아주라.”  멜의 달콤한 속삭임은 코브의 욕망 그 자체이다.  코브가 간절히 원하는 욕망을 멜이라는 투사체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코브의 꿈 속에서 나타나는 멜은 코브가 생각하고 바라는 형태의 멜인 것이다.  더욱이 코브는 멜에게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기에 꿈속에서의 멜은 그것에 충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멜과 코브의 대화는 정확히는 코브의 자아와 욕망과의 대화에 불과하다.  스스로 이겨내야할 문제인 것이다.

  결국 코브는 피셔를 구해내는데 성공하여 아리아드네와 피셔를 킥 시키지만 아직 사이토를 찾기 못했기에 홀로 남는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을 남긴채 현실로 돌아간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현실에서의 짧은 순간은 림보에서의 영원이기에 코브는 영원과 같은 시간을 해맨다.  결국 완전히 늙어버린 사이토를 찾는데 성공하여 그를 설득해 현실로 돌아간다.  현실로 돌아온 사이토는 코브의 혐의를 벗겨주기 위해 전화를 한통 넣게 되고 이에 코브는 무사히 입국대를 통과한다.  집으로 돌아간 코브는 아이들을 만난다.  항상 뒷모습만 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코브는 림보에 빠진 상태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의 의미는 그 순간을 자신의 현실로 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코브는 꿈 속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물론 그가 그곳에 만족을 얻고 환상에 머물기로 결심한다면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실의 자신은 정신병자가 되겠지만 말이다. 

  코브는 집에 돌아가 자신의 토템을 돌린채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그는 더이상 토템을 확인하지 않는다.  아들을 만나는 그 순간이 자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토템은 쓰러질듯 비틀거리다 해답을 주지 않은채 영화는 끝맺는다.  코브는 과연 꿈속의 환상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현실로 돌아온 것일까?  우리가 본 마지막 장면은 코브가 만든 정교한 환상인 것일까?  아니면 진짜 현실인 것일까?   무엇이 되었건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내가 존재하고,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의해 나의 생각이 영향을 받는다면, 데카르트가 주장한 자기투명성을 가지는 단일한 주체는 무너지게 된다.  더욱이 프로이트가 발견한 초자아는 내 안에 존재하는 금기의 기준 즉 타자에 대한 생각을 제시한다.  나의 내면에 타자의 생각과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은 더이상 주체 중심의 철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정신분석학의 등장으로 인해 근대 주체철학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나’는 의식적 자아가 아닌 무의식에서 찾아야한다.


[1] 거울은 실제 거울이 아닌 비유적인 표현으로 거울상으로서의 어머니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아이는 어머니의 행동을 관찰하여 거울과 같은 이미지를 생성하여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울신경세포이다.  이 세포의 존재를 통해 인간이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거나 타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설명하게 된다.

[2] 투사는 방어기제의 하나로서 불쾌하거나 감당하기 힘든 충동들을 마치 외부에서 기인하는것처럼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제일 좋은 예가 어떤 일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나의 실수가 아닌 남과 환경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 Me gusta

    | 2013.09.03 11:01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너무 좋은 글인데 이해가 어려워
    집에가서 천천히 다시 읽어 봐야 겠네요~ ^^

  2. 와코루

    | 2013.09.03 11:05 | PERMALINK | EDIT | REPLY |

    인셉션 재미있게 봤었는데 꿈과 환상의로의 도피로 생각 할 수도 있겠군요~ㅎㅎ

  3. 가루희준

    | 2013.09.27 13:26 | PERMALINK | EDIT | REPLY |

    저런 내용을 영화 속에 그렇게 재미있게 눅여내다니 놀란 감독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서 영화 결말 해석 중에 놀란 감독이 우리에게 인셉션을 했다! 우린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라는 설도 있었죠 ㅋㅋ

    저 근데 '라느님이진리'라는 이름은...왜 차단된거죠 ㅠ?

  4.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3.09.27 14:22 신고 | PERMALINK | EDIT |

    차단 확인해보니 고건 차단 안돼있어요.

    이게 가끔 잘 이래요. 정확한 원인은 몰겠지만..

    어떤 조건이 만족되면 무조건 차단됐다고 뜨거든요.

  5. 니케

    | 2013.12.14 14:56 | PERMALINK | EDIT | REPLY |

    대박!! 이런글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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