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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성 라퓨타(1986), 유토피아의 양면적 성격과 도구적 이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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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성 라퓨타(1986), 유토피아의 양면적 성격과 도구적 이성

유쾌한 인문학 2010. 2. 5.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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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퓨타
걸리버 여행기에서 나오는 천공의 섬 이름이죠.  하야오의 만화에선 하나의 도시이자 제국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세계를 지배했던 대제국. 
그런데 그들은 어느날 지상에서의 삶을 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멸망하여버렸죠.  만화내에서 라퓨타에 대한 설정은 엄청나게 발전한 기계문명의 정수입니다.  그 엄청난 도시가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받힐 수 있는 비행석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로보트 등 실로 엄청난 문명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죠. 

라퓨타 문명의 최후 생존자이자 왕족인 시타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파즈.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봅시다.


유토피아
라퓨타라는 작품을 제대로 보기위해선 유토피아에 대해서 조금 알아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유토피아라는 말을 정말 자주 사용하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른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유토피아는 무엇일까요?  한번 알아봅시다.  유토피아라는 말을 제일 처음 쓴 사람은 '토머스 모어'입니다.  토머스 모어는 영국사람으로 이혼사건으로 유명한 헨리8세 당시의 대법관입니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자신의 공상을 담은 이야기형식의 책이죠.  사실 유토피아 이전에도 이상세계에 대한 생각들은 존재했습니다.  코케인이나 아르카디아, 천년왕국 등으로 표현되죠. 

코케인은 인간이 꿈꾼 이상사회중 가장 환상적인 세상입니다.  여기선 안되는게 없어요.  늙지도 않구요.  낮밤도 따로 구분이 없고 먹을껀 넘쳐 흐르고 노동의 필요성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죠.  아르카디아는 코케인과 비슷하지만 약간 약해요.  아르카디아 역시 기본적으로 살기 좋은 곳이죠.  풍요롭고 기후도 딱 살기 좋고 다만 코케인과의 차이점은 절제와 조화가 있다는 거죠.  쉽게 말하자면 코케인은 환락과 쾌락의 이상사회이고 아르카디아는 편안한 휴식이 있는 이상사회라는겁니다.용짱아르카디아를 잘 설명하는 신화들이 존재하는데 중국의 삼황오제시대 같은걸 들 수 있죠.

천년왕국은 뭘까요?  천년왕국은 하나의 이즘으로서 존재하는건데 아주 중요한 이론이죠.  하지만 여기선 가볍게 알아보죠.  천년왕국은 크리스트교의 지상낙원인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재림 후 최후의 심판이 오기 전 천년동안 예수가 다스린다고 되어있거든요.  그 천년간의 기간을 말하는겁니다.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예수재림과 함께 부활한 성인과 순교자들이죠. 미래지향적이고 기존사회질서와의 단절이 중요하구요.  이정도로 합시다.

위에서 본 코케인, 아르카디아, 천년왕국과 유토피아의 차이점은 유토피아는 현실적이라는겁니다.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지도 않고 자연과 인간의 극적인 변화를 가정하지도 않습니다.  
유토피아가 추구하는 것은 재화가 풍족하지 않다는 현실 그 자체를 일단 인정하고 외적 규제를 통해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려는데 있습니다.  즉 인위적인거죠.  그러다보니 유토피아는 사회제도나 조직을 이상화하게 되고,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고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려고 하죠.  바로 이지점이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입니다.  유토피아에 대해 좀더 알아보죠.

이러한 유토피아는 크게 세가지 역사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전적 유토피아.  둘째 근대적 유토피아.  셋째 현대적 유토피아.  

고전적 유토피아는 사변적 성격이 강하고 19세기의 근대적 유토피아는 사회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근대적 유토피아의 지배적 생각은 사회주의 사상이죠.  효율적인 사회조직 및 제도를 통해 평등을 추구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풍요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겁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생각에 제동이 걸리죠.  이유야 간단합니다.  근대이성의 미친 광기를 경험했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풍요를 보장받고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며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려고 하는 근대적 유토피아는 비판받게 됩니다.  

이때 나오는 문학이 디스토피아 문학들이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오웰의 1984 같은 작품말입니다.  사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상호의존적입니다.  결국 하나의 세상을 놓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거니간요.  즉 유토피아가 깨진 거울에 서있다고 했을때 그 깨진 거울에 비친 상이 바로 디스토피아가 되는겁니다.  디스토피아 문학의 출현으로 어느정도 유토피아 이론은 침체되어있다 1950년대 즈음하여 다시금 고개를 들게 됩니다.  이때부턴 다양한 양태로 변형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에코토피아, 페미니즘 유토피아 등등 여러가지 종류가 많습니다.  사실 하야오의 작품을 에코토피아를 가지고 일관적으로 비평하는 논문들도 몇개 본적 있습니다.

암튼 그중 눈여겨 볼만한 사람은 바로 마르쿠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결합한 이론을 창시한 사람인데 그의 주저중에 에로스와 문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된 충동이 사회에 유익하게 승화되는 과정을 문화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현대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 수록 생산성을 높이려고 하고 그로인해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되는 충동이 점점 과잉된다는거죠.  이를 과잉억압이라 칭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해방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이고 결국 마르쿠제가 생각한 것은 노동과 놀이,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과잉억압을 해제한다는 것이죠.



유토피아와 도구적 이성
하야오 만화의 특징이라고나 할까요.  몇가지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폭력적이고 남성중심적 문화의 극단과 자연을 대비시키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이를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도구적 이성.  이것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없습니다.

근대 합리적 이성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인간을 중심에 세우게 됩니다.  생각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명증성에서 시작된 그의 세계의 재구축 작업의 핵심은 중심에 선 인간.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내가 생각에 속하는게 아니라 생각이 나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자기 투명성을 가지게 되지요.  자기투명성이란 내가 내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채 그 어떤 것도 나의 사유와 인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코키토가 인간을 중심에 세운건 좋았는데 이게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됩니다.  목적지향적이게 되고 효율성만을 추구하게 되고 그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게 되죠.  이것이 바로 인간 이외의 것은 전부다 도구화시켜버리는 도구적 이성입니다.  중심에 인간을 놓고 자신만을 보증하는 이런 식의 주체성은 주변의 것들에 대한 극히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생태 파괴적이고 환경 파괴적인 모습말이죠.  그뿐인가요?  자기자신만을 보증하다보니 자신 이외의 인간 역시 도구화시키게 되죠.

사실 유토피아의 추구라는게 인간 이성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현상입니다.  유토피아 이전의 이상세계론의 이론인 코케인이나 아르카디아, 천년왕국 등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추구라기보단 우연적 요소에 기대는 모습을 보여주죠.용짱하지만 유토피아는 인간 이성에 의해 제도를 정비하고 자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고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이상세계를 추구한다.  결국 핵심은 도구적 이성론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자신감입니다.  결국 둘은 맥이 닿아있는거죠.  어떤사람은 제가 항상 데카르트 타령만 한다고도 하는데 사실 데카르트를 빼면 얘기가 안됩니다.  시작은 항상 거기서부터죠.  




기술문명과 자연
실제 만화속에서도 인간을 중심에 세운채 자연을 도구로 여기는 자연파괴적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래의 스샷을 보면 알겠지만 기술문명의 하나로서 탄광과 각종 무기들과 자연이 그대로 대비되고 있죠. 
하야오 만화의 또 다른 특징으로 불과 물의 상징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인간문명은 불이라는 상징으로 자연의 치유력은 물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되는겁니다.  인간문명의 상징으로서의 불은 단순한 기술문명 뿐만 아니라 각종 무기들로 표현되는바 극중에서도 각종 화약무기들이 등장하게 되는바 불의 상징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뿐아니라 극중 악당과 시타와 파즈 역시 기술문명과 자연의 상징적 매개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극중 악당은 라퓨타를 찾아내 그 기술문명을 이용하여 다시금 대제국을 일으켜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죠.  하지만 극중 주인공인 시타와 파즈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자연과 더불어가는 삶을 선택하게 되지요.




천공의 성과 두가지 의미
라퓨타이니 역시 천공의 성의 상징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은 참 독특합니다.  초반에 오프닝송이 나올때 보면 수많은 천공의 성이 날아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대제국이었던거죠.  그 생김새는 직접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형적인 도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엄청난 기술문명을 이루어냈고 유토피아를 만들어냈다고 했지만 결국 이는 라퓨타인들만의 유토피아에 불과하죠.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겐 라퓨타는 악몽 그 자체일겁니다.  심심하면 궁극이 레이저포를 쏘아붙여 다 멸망시켜버릴 수 있는 대제국.  

라퓨타 제국의 입장에선 지상의 인간은 자신들의 제국 유지를 위한 도구일뿐이죠.  결국 유토피아를 완성은 했지만 모든 인간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현실도 마찬가지죠.  서구문명으로 대표되는 국가들이 이루어낸 엄청난 기술문명으로 인해 재화가 풍족해졌지만 모든 인류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던가요?  아프리카에선 지금 이순간도 굶어죽어가는 아이들이 수두룩하죠.  그렇다고 서구분명 내에서는 다들 평등하게 잘 살아갑니까?  넘쳐나는 재화와 넘쳐나는 노숙자의 대비가 참 기가막힌게 현실 아닙니까?  결국 라퓨타는 깨진 거울에 비친 상으로서의 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에 불과한거죠. 

둘째.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라퓨타인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포기한 이후입니다.  다파괴되고 홀로 떠나니는 단 하나 남은 라퓨타를 보면 과거 찬란했던 대제국시절의 라퓨타와는 그 모습이 약간 다릅니다.  위의 스샷과 아래의 스샷을 비교해보시죠. 
버려진 라퓨타는 거대한 나무에 의해 전체가 감싸져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죠.  그리고 인간에 의해 버려지고 단 하나 남은 라퓨타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거대한 폭풍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폭풍우를 제어하는 기술 역시 인간의 기술입니다.  이런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간문명의 정수인 라퓨타를 자연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절정의 인간문명을 자연이 온몸으로 휘감고 있는 것이죠.  자연은 저러한 인간문명의 정수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는 로보트도 다 끌어안은채 자신의 일부로 삼고 있죠.  실로 그 로보트 역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또 한가지 재미있는 상징성은 라퓨타 자체의 구조입니다.  라퓨타는 크게 두층으로 나누어볼 수 있어요.  기술문명의 정수인 하층부와 자연 그 자체로서의 상층부입니다.  옆의 스샷에서 아래쪽의 동그란 돔이 바로 기술문명의 정수로서의 하층부이죠.  실제 라퓨타에 진입하게 될때 시타와 파즈는 상층부로 진입을 하지만 악당들은 하층부로 진입을 하게 됩니다.  기계문명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도구화하려고 하는 악당들과 자연과 인간을 목적으로 삼은채 더불어살아가려는 시타와 파즈의 상징성이 잘나타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악당, 도라
시타를 도와주는 해적인 도라는 뭐라고 할까요.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황야의 마녀와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용짱악당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차마 미워할 수는 없는 캐릭터.  은근히 사랑스럽기까지 하죠.  왜일까요?  이들은 명백한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황야의 마녀나 도라 둘다 극중 여주인공인 소피나 시타의 영향을 받아 옳바른 가치판단을 내리게 되죠.  결국 라퓨타에서 도라는 시타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야오 만화에서 나오는 모든 여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치유적 기능의 발현인거죠.



기술문명의 궁극은 유토피아일까?

극중 여주인공 시타는 마지막에 라퓨타의 하층부 즉 기술문명의 정수를 스스로 파괴해버립니다.  그리고 라퓨타는 비행석만을 안은채 저멀리 사라지게 되죠.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왜 라퓨타 대제국의 왕족들은 그들의 도시와 그들의 제국을 포기하고 지상으로 내려왔을까요?  간단한거 아니겠습니까?  기술문명의 궁극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다는거죠.  얼마나 괴로웠으면 전부다 버리고 땅으로 내려왔겠습니까?  뭐가 그들을 그렇게 괴롭게 만든건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바는 엄청난 기술문명의 궁극이 과연 우리의 생각처럼 살기좋고 아름다운 유토피아로서의 모습으로 다가올것인가에 대한 질문아니겠습니까? 

생각해봅시다.  현대사회가 이룩해낸 엄청난 기술문명이 정말 우리에게 행복만을 가져다줬습니까?  아니죠.  마르쿠제의 생각처럼 엄청난 기술문명은 우리에게 생산성 향상이라는 명목하에 엄청난 과잉억압만을 가져다 주었을뿐이죠.  기술문명의 발전에 의해 풍족해졌지만 여전히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은 속출하고 있습니다.  풍족해졌지만 인간의 삶은 풍족하기전과 다른게 뭐가있습니까?  전형적인 풍요속의 빈곤현상입니다.  그뿐입니까?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고 자연의 도전에 맞선다는 식의 유토피아론은 자연을 파괴하게 되죠.  근데 문제가 자연을 제어함으로 인해 자연의 도전에 맞설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게 알고보니 아니라는겁니다.  자신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인간에 맞서 자연은 엄청난 보복을 행하게 되죠.  안그런가요? 

결국 중요한 것은 더이상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적 주체가 불러온 이성의 광기는 실로 놀라울 정도니깐요.  결국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지식에 대한 성찰은 필연적으로 권력관계를 품고 있는 역사사회학적 분석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죠.  바로 구조주의의 탄생입니다.  관심있으신분은 이글을 참조하시면 좋겠어요.  "데카르트 코키토에서 랑그언어학, 구조주의까지"  자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우리는 궁극의 유토피아인 라퓨타를 추구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기술문명의 정수가 과연 유토피아를 불러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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