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관리 메뉴

★ image or real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세가지 지식인과 파괴적 남성문화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세가지 지식인과 파괴적 남성문화

유쾌한 인문학 2010. 6. 16. 12:48
반응형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그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함을 선사하게 된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진일보하였고 더불어 마법이 공존하는 세계로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기술과 마법이 융합되어있는 궁극의 유토피아를 그려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러한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인간이 행하는 것은 전쟁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궁극의 유토피아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상정한채 그안에서 살아가는 마법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된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주인공 소피는 우연히 하울을 한번 만난 운명 탓에 황야의 마녀에 의해 저주에 걸리게 된다.  그만 노인으로 변하게 되버린 것이다.  이에 소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고 하울의 성에서 살게 된다.






전쟁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설정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크게 보아 두개의 제국이 존재하며 그들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재미있는 것은 하울의 성이다.  기괴한 모습을 띈 움직이는 성인데 그 성의 문은 다양한 곳으로 통한다.  진짜 그 성의 문으로 나갈 수도 있고 두 제국의 수도에 있는 집으로 나갈 수도 있다.  하울은 이러한 공간을 상정한채 두 제국 모두에 적을 두어 각기 다른 젠킹스와 팬드라곤이라는 이름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두 제국은 하울에게 성으로 오라고 연통을 보내게 된다.  한마디로 전쟁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하야오 작품의 주된 특징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공존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방식은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울에서 그려지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은 기술과 마법의 융합으로 엄청나게 진보한 유토피아적 상황의 제시와 그러한 진일보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두 제국의 전쟁이다.  더욱이 수도에 사는 사람들이나 전투지역이 아닌 곳에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도 평온하기 이를데 없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참혹하기 이를데가 없다.  이러한 극단적인 양자의 대비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가지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을 잘 드러내게 된다.



유성을 붙잡은 하울과 지식인의 나르시즘

하울과 캘시퍼는 아주 특별한 사이이다. 캘시퍼의 정체는 유성으로 어느날 유성이 엄청나게 떨어지던 밤에 하울은 캘시퍼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캘시퍼에게 심장을 주어 계약을 맺게 된다.  흔히 캘시퍼와의 계약을 두고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캘시퍼가 그렇게 사악한 악마성을 드러내진 않는다.  캘시퍼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영혼을 요구하는 따위의 행위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계약이라는 이름하에 서로 묶여있는 동료처럼 보인다.  이 계약을 통해 하울은 정말 엄청난 능력을 가진 뛰어난 마법사로 거듭나게 된다.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스승인 설리반과 맞설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 환상의 세계에서 마법사는 어떤 존재일까?  그것은 바로 지식인이다. 


하울하면 인상깊은 장면이 있는데 소피가 성을 청소하다가 뭔가를 잘못 건들여 하울의 빛나던 금발이 흑발이 되어버리는 사건이다.  이때 하울은 아름답지 못한 자신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게 된다.  실로 엄청난 나르시즘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으로 이러한 대마법사가 보여주는 나르시즘은 지식인의 나르시즘으로 치환이 가능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학문 자체를 양적으로 팽창시키고 철저하게 파편화ㆍ전문화시키게 된다.  더욱이 학문 자체가 시장화되면서 학문은 제도화되고 그 제도권내에 편입된 사람만이 지식인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제도권 내에서의 지식인은 학문적 출세주의가 많은 경우 주된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으며 제도권내에 소속된 지식인은 전문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앞서 내세운 원령공주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측면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연파괴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담게 되지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원령공주 이후 7년이 세월이 지난 후 발표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즉 위대한 기술의 발전을 이끌어내어 유토피아적 세계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지식인은 크게 3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다.  권력에 충실한 지식인과 지식만을 탐하는 지식인 그리고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리고 이들 지식인의 특징은 폭력으로 얼룩진 파괴적 남성문화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권력에 충실한 지식인, 설리반선생

설리반 선생은 하울의 스승으로서 대단한 마법사로 보인다.  하울마저도 감히 대적하기 힘든 엄청난 마법사로서 그녀는 하울을 끊임없이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한다.  쉽게 말해 권력과 제도권의 곁에 두길 원하는 것이다.  이유야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전쟁에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작품 내에서는 권력과 제도권에 충실한 마법사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초보 마법사라는 지식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권력이 요구하는 것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채 괴물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마법사를 통해 약간 떨어지는 지식인들의 활용도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지식인들은 제도권내에서 탄생하게 되며 제도권내에서 지식인이라 추앙받게 된다.  그렇게 전문가 집단이 되어버린 이들은 권력에 충실한 대변자로서 자리매김한다.  비록 자신의 모습이 괴물이 될지라도 말이다.  여기서 권력이란 광의의 권력으로 보아야 한다.  즉 단순하게 정치권력만을 칭하기 보다는 아카데미즘 전반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은 사회 전반이 권력과 제도권의 곁에 두길 원하는 유형으로 철저하게 아카데미 내에서 만들어지고 길러지며 제도권 내에서 지식인이라 추앙받게 된다.  전형적인 학력 우위의 지식인으로 학적 성과보다는 학"력" 자체가 더 중요한 유형이다.  이렇게 전문가집단이 되어버린 이들은 권력에 충실한 대변자가 된다.  


그럼 권력이란 무엇일까?  흔히 권력은 한점에 집중되어 그 집중된 권력이 피억압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권력은 한점에 집중되어 있다기보다는 사회전체의 그물망속에 분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즉 개개인은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자이자 권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때 지식인은 아카데미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억압을 통해 아카데미의 존속을 추구하게 된다.  아카데미의 존속만이 자신들의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전반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인 양상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아카데미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국가에서는 어딜 가던 찾아 볼 수 있다.  어느 나라를 가던 다양한 형태의 국가 교육기관이 존재하며 이들 하나 하나가 바로 아카데미가 되어 과정을 이수한 사람은 당대의 최고의 전문가이자 지식인으로 최상단의 계급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중요한건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이러한 아카데미의 보수성이 그 정도를 넘어서게 됐을때 이에 반발하여 거부하는 집단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보통 예술 계통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게 되고 큰 흐름을 만들어내게 된다면 이들이 다시금 아카데미의 중심에 서게 된다.  결국 이는 대단히 순환적인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지식만을 원하는자, 황야의 마녀

황야의 마녀은 소피를 할머니로 만든 장본인이다.  언뜻보면 나쁜 마법사처럼 보이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그런 캐릭터성을 보여준다.  황야의 마녀는 하울의 심장에 대해 엄청나게 집착하게 된다.  만약 하울의 심장을 가진다면 하울의 지식과 캘시퍼의 지식까지 동시에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황야의 마녀는 하울의 심장이 상징하는 더 큰 지식에 집착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황야의 마녀는 하야오 만화의 전형적 특징을 잘 표현하게 되는바 분명 악역이긴 한데 딱히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결국 황야의 마녀는 순수하게 악 그 자체를 추구하는자라기 보다는 그냥 가치관의 부재로 보는게 옳을 것이다.  


즉 전형적인 가치관 부재의 지식인들이다.  아카데미 내에 있을 수도 있고 밖에 있을 수도 있지만 자명한 사실은 논리칙에 근거한 지식의 단순한 추구를 목표로 한다.  이성 중심의 논리칙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외 사족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선 적대적인 양상마저 보여준다.  논리적이지 않고 학적 체계와 관련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 자체를 두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가치관을 보여주지 않는다.  학적성과를 토대로 사회 현실을 긍정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실천성을 띄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에 대한 평가에도 부정적이다.  오직 학적 체계와 논리칙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황야의 마녀는 전형적인 가치관 부재의 지식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지식의 활용도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그냥 지식을 탐할 뿐이다.  남에게 저주를 걸수는 있을지언정 저주를 푸는 방법은 모른다.  


이러한 자들의 존재는 대부분 아카데미 내에 있게 되지만 권력 입장에서 딱히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그들이 가지는 체계가 당대를 규정하는 권력 전반에 적합하다는 보장도 없고 더욱이 이들이 아카데미 바깥에 있다면 일정한 방법으로 제어할 방법도 없기에 도리어 상황에 따라선 대단히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즉 자신들이 구체적인 실천론으로서 무언가를 창출하지 않더라도 논리칙 자체가 타인에 의해 다양하게 변형 활용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학만을 추구하던 자가 자신이 만든 논리가 변형되어 정치논리로 사용되는 것은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작품 속에서 황야의 마녀는 비록 지식만을 탐하는 존재이지만 권력 입장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녀의 힘을 빼앗게 된다.



실천적 지식인, 하울

실천적 지식인이란 자신이 이룩해낸 학적 체계 또는 사상을 통해 스스로 권력 내부로 침투하여 그 내부에서부터 침몰을 유도함으로써 자신의 전문영역 내에서 구체적 실천을 하는 지식인을 말한다.  즉 유토피아적 환상도 거부하고 각종 정파의 억압, 이데올로기도 다 거부한채 오직 자신의 지위를 구체적인 실천성에 활용하는 지식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칙보단 실천평가이다.  하울이야 말로 전형적인 실천적 지식인의 양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얼핏보면 그는 도망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결코 도망치지 않았는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전쟁을 막기위해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여볼려고 노력하는 지식인이다.  하지만 그런 하울에게도 아슬아슬한 측면은 분명히 존재한다.  극중에서 하울이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점차 어려워지고 자신의 무력함에 사로잡히면서 나르시즘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인간의 모습보단 괴물의 모습으로 점점 변해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점점 잃어가는 자기 본연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절망으로 다가올때 저렇게 자신을 잃어가는거 아니겠는가?


이러한 하울의 붕괴를 막아주는 인물이 바로 소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서는 파괴적 남성문화의 상징성과 치유적 여성의 상징성의 대립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소피는 후자에 서게 되는 인물이다.  소피는 모두를 치유하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황야의 마녀가 힘을 잃고 일게 노인이 되었을때 소피는 그녀를 보살펴주게 되며 마지막에 황야의 마녀가 여전히 하울의 심장을 노릴때에도 결국 그녀의 그릇된 욕망을 치유하게 된다.  소피는 하울의 상처 역시 보듬어주게 되는바 하울이 가지는 상처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학살에 남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이다.  저러다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리면 초보 마법사들과 다를바 없게 되겠지만 소피는 그런 그를 붙잡아주고 그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유토피아와 지식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앞선 작품에서 자연파괴나 전쟁등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인간 문명을 비판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 역시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오면서 약간 무뎌지게 된다.  즉 밑도 끝도 없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 얼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무조건적인 자연과의 화해의 주장이 과연 실천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그려내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명이 이룩해낸 위대한 유토피아적 상황은 결국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균형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활동이다.  이 작품에서 하울이 보여주는 행동양상은 대단히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하울과 같은 지식인은 얼마나 되는지?  그럼 반대로 설리반과 황야의 마녀와 같은 지식인은 또 얼마나 되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인 것이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