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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2010), 라캉 정신분석과 주체의 문제 본문

영 화/10's 영화

인셉션(2010), 라캉 정신분석과 주체의 문제

유쾌한 인문학 2010. 11. 1.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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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Inception)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7번째 장편 영화이다.  많은 분들이 놀란 감독의 영화는 메멘토부터라고 생각하시지만 그 이전에 미행이라는 작품과 단편영화가 하나 존재한다.  사실 놀란 감독이야 정신분석 이론에 입각하여 주체성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그 기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꺼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인셉션은 아주 그냥 대놓고 이론을 영상화 시켜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캉 정신분석과 구조주의의 영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신분석 이론이야 프로이트에서 융, 라캉 이렇게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라캉 밑으로 분파 이론가들이 존재한다.  아무튼 이 셋중 왜 라캉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장치에 기인한다.  중후기 이론부터 소쉬르에서 비롯된 구조주의 사조에 영향을 심각하게 받게 되었다.  사실 영화 내에 존재하는 모든 건축물들은 마치 미로와 같은 구조의 형태를 띄게 되는데 이러한 건물들의 이미지들이 구조주의의 핵심적 사상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크게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써보겠다.  이론 그자체의 설명과 그 이론이 영화속에서 어떻게 영상화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라캉 정신분석 
데카르트가 행한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그가 발견하게 된 것은 단순히 나의 존재를 넘어서 의심하는 의식 활동자로서의 나의 존재이다.  이러한 일체의 의식활동을 사유라고 부르게 되고 의식 활동 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의 확실성은 "코키토 에르고 숨"으로 표현된다.  이것의 의미는 나의 사유와 나의 존재가 별개의 사태가 아니라 나의 존재는 나의 사유 활동 그 자체로서 확인되며 존재하는 나의 본질 그 자체가 바로 사유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발견한 자아이다.  데카르트의 이론은 이원론에 근간하여 유아론에 빠져들어 근본적 한계점을 들어내게 되지만 그가 발견한 자아는 이후 근대철학의 시초가 되어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후 프로이트는 데카르트가 발견한 자아를 획기적으로 역발상하여 전개시키게 된다.  이른바 무의식의 발견이다.  프로이트에서 시작된 정신분석 이론은 이후 융의 집단무의식의 발견으로 인한 융학파로의 분파 그리고 훗날 라캉의 등장으로 인해 프로이트로의 회귀가 주장되기에 이른다.  이중에서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유의미한 정신분석 이론은 바로 라캉학파의 이론이다.  라캉 학파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프로이트로의 회귀와 당대 사상계를 휘어잡았던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비롯된 구조주의의 이론의 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와 정신분석의 만남은 기존의 프로이트나 융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 독창적인 정신분석 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기본적 근간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흔히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의식을 조종하여 자발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알고보니 의식은 무의식적 구조에 조종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고 이러한 사고관으로 인해서 데카르트 이후로부터 내려온 자아철학은 전부 무너져내리게 된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되어진다"는 명제 위에서 의식은 거울속의 환상이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실재적으로 믿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믿음이 만들어진 아니 구성되어진 의식이라는 것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계보위에 서있지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낸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자아 형성과정의 첫단계는 거울단계이다.  거울단계는 언어활동 이전의 어린아이에게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아이가 거울을 보고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게 되면 처음엔 그 이미지를 혼동하게 되며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거울을 보면서 아이는 자신이 하나의 전체로서의 완전한 형태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언어활동 이전이므로 언어활동을 통한 경계설정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경계설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경험 즉 파편화된 신체의경험을 가지게 된다.  

이때 자신의 신체를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적 경험과 거울속의 완벽한 이미지는 서로 상충하게 되고, 아이는 자신의 불완전한 신체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거울속의 이미지를 자신이라 생각하고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이때 얻어지는 것이 자아의 동일화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자아는 한계가 뚜렷한데 오인에서 비롯되는 자아로서 객관과 주관, 실재와 영상, 나와 타인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상상계의 자아라고 부른다.  하지만 세상은 이자적 구조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자적 구조이며 그속에는 법과 원칙이 존재하며 이 모든 것들을 총괄하는 구조가 존재한다.  

결국 사람은 이자적 구조에서 넘어 현실의 상징적 세계로 나아가야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되는것이 바로 언어의 기능이다.  상징적 언어를 익히면서 인간은 체험적 상상을 무의식으로 억압하게 되고 현실의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의 상징적 질서는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그 사회와 문화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으며 언어의 획득은 그 체계안에서 나의 위치를 지정하게 된다.  언어를 획득하게 되면서 나는 그 사회가 허용과 금지, 명령체계 따위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 틀안에서 나 자신을 객관화 하여 이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결국 이때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 되며 이것을 상징계의 주체라고 부른다.  무엇이 되었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최초의 행위가 스스로의 구성이 아닌 외부에서의 주어짐이라는 것이다.  주체는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바깥은 밖이 아닌 주체의 안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문제는 상상계와 상징계에서 각기 형성된 두 주체의 관계의 문제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건 욕망의 문제.  즉 인간의 욕망이 정말로 언어 구조 즉 사회구조에 의해서 구성된 타자의 욕망의 내면화에 불과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단순하게 타자의 욕망의 내재화라고만 보는 것은 뚜렷하게 한계가 존재한다.  단순히 확 들어나는 욕망.  사회에서 좋다고 하는 직업을 얻기 위한 욕망 학교에 가기 위한 욕망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거 있지 않은가?  가끔씩 밑도 끝도 없이 우리 가슴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엄청난 공허감.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채우고 싶은 욕망.  바로 그것이다.

결국 욕망의 진정함은 결핍에 존재하게 된다.  상징 자체가 결여하고 상징 체계는 절대로 채워줄 수 없는 근본적 결핍이다.  사실 상상계적 동일시 역시 이러한 근본적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정말 내밀하고 무한에 가까운 심연에 가까운 결핍과 그것의 채움에 대한 욕망.  하지만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그것.  원하는걸 아무리 얻는다해도 반드시 남겨지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표출 방식으로 소쉬르 언어학에 근간을 두게 된다.  물론 라캉은 소쉬르 언어학을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렇기에 기표, 기의는 라캉에 와서 능기, 소기로 다르게 번역되게 된다.  의미가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를 거의 1대 1로 대응된다고 보았지만 라캉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즉 소기는 여러개의 능기들의 연쇄구조 즉 체계안에서 미끄러진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이 분출되는 방식이다.  어느 사람이 어떠한 문장을 말한다 하더라도 흔히 생각하는 소기가 그대로 표출된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나름대로 어떤 말을 하게 되지만 그것의 진의는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되어진다"는 명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부모의 성관계를 목격했다고 해보자.  이 아이는 이 성관계를 보기는 하지만 이것의 의미를 알수는 없다.  즉 소기(기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성관계를 행하는 그 자체는 능기(기표)가 되어 무의식에 저장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벽이고 소기의 억압이 된다.  이는 모든 인간이 행하는 언어행위에 있어서의 본질적 한계이다.  예를 들어 한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어떤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쓴다고 했을때 그 떼를 쓰는 능기의 의미는 단순히 저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관심을 끌고자하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물질적 표출행위에서 단 하나의 소기가 표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 구조는 크게 은유와 환유라는 기초에 의해서 구성된다.

은유가 된다는 것은 그 기표 아래에 흐르고 있는 기의가 통상적인 의미와 달라졌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계열체와 결합체적 특성을 구분하게 되는바 이를 두고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라고 각기 칭하게 된다.  라캉은 은유를 압축이라고 칭하고 환유를 치환이라고 칭하게 된다.  압축은 무의식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응축되어서 대단히 복잡한 언어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게 되는바 이는 꿈이라는 형태를 통해 등장하게 된다.  치환은 결과가 원인을 상징할때(그 반대) 또는 부분이 전체를(그 반대) 의미할때를 말한다.  

무엇이 되었건 이러한 근원적 욕망은 은유를 통해서 채우려고 한다.  예컨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욕망하게 될때 이것 역시 근원적 욕망의 은유에 불과하다.  엄마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기표로서 자리매김하지만 기의는 텅 비어있다.  위에서 말했듯 기표와 기의는 1대 1로 대응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미끌어지는 텅빈 공간일뿐이다.  그렇기에 은유로서 채우려고 하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 결핍인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 욕망은 은유 외에는 표현할 방식이 없고, 한편으론 그 어떤 은유도 그 자체가 이미 텅비어있기에 채워질 수 없다.  따라서 기표는 끊임없이 다른 기표로 미끄러지게 된다.  텅빈 기의를 외면하고 기표에서 기표로만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유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이해하면 이 영화가 얼마나 이론을 완벽하게 영상화시킨건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자세한 이해을 위해서 세부적으로 설명해보겠다.




기억과 주체 그리고 이데올로기
영화내의 설정은 크게 두가지로 존재한다.  기억을 훔치는 것과 기억을 삽입시키는 것이다.  기억을 삽입시키는 것을 인셉션이라고 부르고 영화의 전체 내용은 인셉션 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기억과 주체성의 문제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측면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름, 학적, 직장, 주소, 국적 등등 말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하나의 주체가 구성되기 위한 형식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필요한 것이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쌓아올리게 되는 형식적 요소들의 내용적 요소.  즉 기억을 실체적 요소라 할 수 있겠고 바로 이부분이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핵심적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기억의 실체적 요소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억압되기도 한다.  여러가지 케이스가 있겠지만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어린시절 목격한 성관계 장면이나 그외에 오이디푸스와 같은 사회체계가 금기시 하는 욕망들 등등 여러가지가 있겠다.  무엇이 되었던 일단 억압되면 벽이 세워지게 된다.  즉 기호=기표/기의 라고 했을때 / 이부분이 바로 억압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억압된 것들은 지속적으로 외부로 나오려 하지만 반드시 은유된 형태로 그리고 기표와 기표들을 미끄러지듯 의식에 침투하므로 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이 된다.  이것을 훔치로 들어간다는 영화적 설정은 마치 분석가가 분석을 하는 과정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중요한건 인셉션이라는 기억을 삽입시키는 과정이다.  가장 깊숙한 곳에 생각의 단초를 심어 그 단초가 그 사람을 지배하게 만드는 형식이다.  이부분이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이다.  위의 이론부분에서 이미 다 설명한 부분인데 좀 더 쉽게 말해보자면 영화상에서 기억이 심어진 자는 절대로 심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채 완벽하게 심어져야 그 단초가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즉 그 단초로 인해 주체가 새롭게 성립된다는 말이다.  사실 이건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다.  우린 모두 인셉션 당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온갖 규범들과상식이라고 말하는 것들, 옳다고 여기는 것들 이러한 규범적 요소들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우리의 최초의 언어활동과 동시에 단초가 되어 인셉션 된다.  

이러한 생각의 단초들은 흔히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알튀세르는 사회주의 혁명 이론 이전의 모든 철학 사상 모든 정치 경제 제도가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서 단서만 딱 놓고 본다면 우리가 흔히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회 체계의 유지를 위한 구조안의 자리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인간 주체는 오직 상상적 오인 안에서 구조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음을 가르쳐주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은 자유로운 주체이며 자유선택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는 실체로서 믿게 한다.  여기에 단 한치의 의심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면에 존재하는 구조 자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셉션 당한자는 철저하게 설계된 꿈의 구조 안에서 생각의 단초를 인셉션 당하게 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꿈의 구조의 설계는 사회 체계 구조를 정확히 상징하게 된다.  사실 상징이랄 것도 없다.  대놓고 지적한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결국 영화 내에서 인셉션 당하는 자나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나 다를바가 없다.  즉 구성되고 만들어진 주체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이 영화에서 또 한가지 흥미롭게 바라볼 부분은 인셉션 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즉 타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의식이라는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남에 무의식 속에 들어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채 의식활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부분에서 매우 중요해지는 포인트는 남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 역시 무의식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극중 디카프리오는 아주 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 상처로 인한 죄책감은 자신의 내부를 엄격하게 구조화시켜 단계별로 억압시키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극중에서 나오는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억압된 그것들은 끊임없이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의식은 무의식의 효과라는 명제는 결국 억압된 내용물이 지속적으로 언어활동 즉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해 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솟아 오름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디카프리오 내면의 이러한 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바로 설계자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타인의 무의식에 들어가 기억을 훔치거나 삽입하는 일련의 행위를 위하여 들어간 의식 역시 자신의 무의식의 효과에 불과하기에 타인의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에 억압된 내용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게 된다.  그게 바로 디카프리오 부인의 등장이 되는 것이다.  툭하면 등장하며 죽이려 달려드는 그녀 말이다.  

또 한가지 영화에서는 가장 내밀한 곳에 갇혀버리는 현상도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갇힘 현상은 경계설정의 붕괴를 의미하게 된다.  즉 거울단계와 언어활동을 통해 생성되는 주체가 붕괴되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붕괴는 나르시즘이 가지고 있는 붕괴와 매료 사이에서 더욱 부각되게 된다.  나르시즘은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이라 볼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자신의 이미지를 통한 자기 도취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다시 억압된 무의식의 자신의 신체에 대한 파편화된 소외가 떠오르며 자신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르시즘은 도취와 소외의 중간에 서있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부분은 결말과 관련된 부분이다.  애시당초에 의식활동 자체는 무의식의 효과이고 무의식의 내용들은 체계에서 의해서 최초로 구성되고 이후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 부가되게 된다.  양자를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분법적으로 딱 나눠서 모 아니면 도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이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되려 그런식으로 접근하면 데카르트가 빠져들었던 오류에 다시금 빠져들게 된다.  결국 중요한건 인간 자체가 체계안에서 생성되는 주체이고 그 언어적 체계에 의해서 무의식이 또다시 만들어지게 된다면 이것들은 분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말해주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마무리
영화를 보기전엔 베르그송을 타켓형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준비도 많이 해봤었는데 역시 무리였던것 같다.  이말 저말 할거 없이 나의 공부가 부족함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총평을 해보자면 정말 재미있고 상상력도 대단한 이론의 완벽한 영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위의 스샷에서 볼 수 있는 저 황량한 이미지는 가히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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