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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광 시대(1925), 골드 러쉬와 물신숭배 본문

영 화/고전 영화

황금광 시대(1925), 골드 러쉬와 물신숭배

유쾌한 인문학 2010. 8. 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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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광 시대(The Gold Rush)
찰리 채플린의 대표 작품중 하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한때 미국에서 불었던 금광 붐과 관련된 내용이다.  배경은 알레스카이다.  뭐 사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알래스카가 1867년에 미국에 편입되었고 그 이후에 이곳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나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금광을 캐기 위해 저곳으로 몰려간것으로 보이고 이 영화는 그러한 사회적 사건을 찰리 채플린식 코미디로 풍자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시점은 이제 유성영화가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따라서 찰리 채플린 역시 대사를 넣게 된다.  배우들의 육성을 동시녹음한게 아니라 나레이터가 상황을 나레이션하고 대신 대사를 말해주는 식이다.  나레이션을 하는 사람은 찰리 채플린 본인이다.  사실 이 사실만해도 엄청난 진일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예를 들어보자면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어린시절에 영화 극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던적이 있었다.  즉 무성영화 시절에는 소리가 없다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고 목소리 좋은 사람이 그자리에서 대사를 전달했다는것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먼저 세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찰리와 멕케이 그리고 블랙이다.  찰리는 금광을 캐기 위해 알레스카로 가게 된다.  멕케이는 금광을 찾게 되지만 날씨가 험악해지자 이둘은 살인자 블랙의 오두막에 모이게 된다.  처음만나게 된 이들은 날씨때문에 오두막에서 기거하다 갇히게 되고 너무 배가 고파 제비를 뽑아 음식을 가지고 오라고 블랙을 보내게 된다.  음식을 찾아 떠난 블랙은 자신을 쫓던 둘을 죽이게 되고 금광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남은 찰리와 짐은 극심한 배고픔에 신발을 요리해 먹기에 이르고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된다.  멕케이는 자신이 찾은 금광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엔 이미 블랙이 있는 상태이고 블랙은 멕케이를 공격하게 된다.  멕케이는 잠시 이동하다 죽게 된다.

찰리는 마을로 내려오게 되는데 그곳에서 조지아라는 여성에게 반하게 된다.  마을에서 가벼운 충돌이 벌어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온 그는 행크라는 사람의 집에 다시 기거하게 된다.  행크는 모험가였기에 찰리에게 집을 맡기고 떠나게 된다.  한편 멕케이는 기절해있다 다시 깨어나게 되는데 그만 금광의 위치를 까먹게 된다.  찰리가 조지아와 만나기 위해 마을에 내려왔을때 멕케이는 찰리를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우연히 금광의 위치를 찾아 둘은 백만장자가 되고 둘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때 배에서 조지아를 다시 만나게 된다.


골드 러쉬와 물신숭배
일단 우리가 흔히 찰리 채플린 하면 흔히 떠오르게 되는 음악들이 귀에 착착 감겨 들어온다.  상당히 재미있는 음악과 상황 그리고 과장된 몸짓들이 지금봐도 상당히 흥미롭다.  찰리 채플린하면 사회풍자적 코미디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폭발하게 되는 시점은 모던 타임즈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고 이 작품은 아직까지 통렬한 풍자가 드러나진 않는다.  이유는 간단한데 찰리 채플린은 당시 골드 러쉬와 관련된 비인간적 행태들과 물신에 대한 사회 전반의 만연한 욕망을 고발하고 싶었고 따라서 대놓고 골드 러쉬를 주제로 삼게 되는데, 제작사와의 관계로 인해 적당히 타협하여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게 되는 작품이다.  

특별히 눈에 띄는 장면이라면 금에 미쳐 살인을 저지르려다가 죽게 되는 블랙과 너무 배가 고파 신발을 삶아서 먹다가 급기야 찰리를 닭으로 보는 장면이다.  모던 타임즈에서 대체 가능성 노동자성을 보여준다면 이 작품에서는 닭이라고 하는 것의 등장과 신발을 먹는 등의 행위를 통해 독특한 알레고리인 절제와 금욕의 알레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기독교 사회에서 특히 미국 특유의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 본다면 육식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색욕 또는 비도덕적 욕망의 알레고리를 형성하게 되고 이것이 우화적으로 표현된다.  어떤면에서 보면 찰리 채플린의 영화야 말로 이런 부분의 표현을 가장 잘 해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아주 단순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이 당대 골드러쉬가 보여주었던 물신의 숭배적 양상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사실 이 작품이 정말 멋지게 끝나려면 찰리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비참하게 그곳에서 죽어버리고 찰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조지아는 찰리를 버리고 금광 채굴에 성공한 졸부와 살게 되는 식으로 엔딩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과정 전반은 아주 훌륭했는데 결말에서 꼬여버린다.  골드러쉬를 비판하고자 해놓고 골드러쉬에 성공해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결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작품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일단 결말이 어떠하던 감독이 찰리 채플린이니 그 감독의 내재적 텍스트성으로 인해 비록 이런식으로 결말이 나오더라도 작품을 채플린 자체의 텍스트성에 비추어 바라볼 수 있으며 작품의 중간 단계들 역시 큰 문제가 없기에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만약 그 이외의 감독들 특히 특별한 철학이 보이지 않는 무의미한 영화들의 나열인 감독이 이런 영화를 내놓는다면 맹렬하게 비판할 수 밖에 없는 소지를 가지게 된다.  즉 헐리웃 동화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말이다.  현실은 엿같은데 영화에서는 항상 행복하게 살았다로 결말을 끌어내기 위해 가식과 허망된 망상을 나열해놓는 그런 영화들.  이런 영화들은 영화라 쓰고 쓰레기라고 밖에 읽을 수 없는거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영화를 바라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감독과 텍스트의 분리가 선행되어 텍스트를 바라보되, 감독 자체의 텍스트성도 별개의 것으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이 둘의 관계에 조명해야 할 것이다.




마무리
한가지 주의할 점은 요즘같은 풍자 정신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시대적 배경자체가 영화의 초창기 시대이고 모든것들이 실험이고 시도인 시절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잣대를 가지고 이 작품에 드리대면 상당히 곤란하다고 하겠다.  두번째로 작품 내재적인 형식과 관련한 시각을 들 수 있겠는데 이 역시 쉽게 말할 부분은 아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예술 매체의 시작단계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어설플 수 밖에 없다는 점.  미리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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