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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1952), 어느 광대와 발레리나 이야기 본문

영 화/고전 영화

라임라이트(1952), 어느 광대와 발레리나 이야기

유쾌한 인문학 2010. 8. 17.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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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Limelight)
살인광 시대 이후 메카시에 의해서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되는 그는 그 다음 작품인 라임라이트로 인해 영국으로 잠시 나가야할 일이 생기게 된다.  그때 채플린은 미국에서 반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무려 20년간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고 정확히 5년뒤 메카시를 비판하는 뉴욕의 왕을 내놓고 그의 작품세계는 끝맺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의 직접적 발단이 되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며 그의 최고의 대표작이라고 칭할 수 있는 영화이다. 

우리는 흔히 찰리 채플린하면 우스꽝스러운 연기와 과장된 몸짓 그리고 사회비판적 요소만을 생각하기 쉽고 그의 작품들은 전부다 그런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채플린의 후기 작품들은 코미디라는 요소를 거의 벗어던지게 되고 정말 진지한 작품들로 임하게 되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이는 것이 바로 라이라이트이다.  그의 필모 중에서 이와 비슷한 영화는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히 로맨틱하고 낭만적이면서 자전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과거 정말 유명했지만 현재 한물간 코미디언인 채플린은 어느날 자살을 기도한 발레리나를 구하게 된다.  그녀를 구해낸 이후 같이 살면서 그녀를 간호하게 되는데 그녀는 정신적인 문제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헌신적인 간호로 인해 결국 그녀는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발레단에서 주목받는 발레리나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 그녀는 채플린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데 채플린은 자신은 너무 늙었으며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가능성도 없기에 그녀를 떠나게 된다.  채플린은 길에서 공연을 하며 살아가는 중인데 우연히 극장장과 그녀를 만나게 된다.  돌아온 그를 위해 자선 공연이 열리게 되고 대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그 이후 그는 숨을 거두게 된다.




비극과 파토스의 문제
어떻게 보면 내용이 무슨 신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엔 이 작품의 무게감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어느덧 늙어버린 코미디언인 자신을 향한 자전적 작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그려내게 된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이 대단히 중요한데 영화내의 두 주인공 캐릭터의 삶이 보여주는 상승 하락 구조가 엇갈리면서 파토스를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즉 두 주인공의 전성기와 최악기가 적당히 어긋나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 발레리나가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을때 채플린은 바닥을 찍게 되니 이 대비에서 극한의 파토스가 생성된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커플의 제시와 그 사이에서 떠오르는 어떤 감정의 요소말이다.  이 감정은 해결할 수 없기에 그 고통이 더욱 커진다.  이성은 그들을 반대하지만 감성은 그들을 옹호하니 이 사이에서 오는 고통이 상당하다.  이러한 고통을 두고 우리는 흔히 파토스라고 칭하게 된다.  이것을 끌어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은 바로 알고보니 나의 연인이 숨겨진 남매였다.  이런 공식이다.  파토스를 끌어내는데 이것만한것도 없고 백번 천번을 반복해도 여전히 먹히니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파토스의 경험은 비극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파토스의 극한이 바로 오이디푸스 아닌가?  오이디푸스의 파토스는 급전과 발견이 결합된 형태이기에 최고의 극한을 보여주게 된다.  사실상 그 이상가는 파토스는 존재할 수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어쨌든 라임라이트 역시 비극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데 특징이라면 대단히 희극적인 비극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두번째 파토스의 공식이 드러나는데 아주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끊임없이 행해지는 코미디 공연들.  이 공연들을 보면 분명 웃기지만 웃기지 않는 그런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이부분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파토스의 이끌어냄의 두번째 방식이다. 

이 방식이 가장 극한에 닿는 지점이 바로 마지막 공연 장면이다.  영화내의 마지막 공연은 정말 웃겨서 대단히 성공적이고 열광어린 공연을 이끌어내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안에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영화속의 공연이 웃기면 웃길수록 영화를 보는 관객의 고통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가 죽음으로써 고통의 파토스는 슬픔으로 승화되어 해결되게 된다.  파토스는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슬픔으로 해결짓는 방식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공식을 보고 신파라고 칭하게 된다.  하지만 신파도 신파 나름.  이 작품은 가히 찰리 채플린 영화 인생에 있어 최고의 역작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대단한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인상 깊은건 대사들인데 대사 하나하나가 마치 시와 같이 느껴질 정도로 주옥같은 말들로 채워지게 된다는 점이다.  무엇하나 버릴 말들이 없다.  정말 예술가로서의 삶과 고통 그리고 채플린의 단면들이 드러나는 것 같은 수많은 장면들과 주옥같은 대사들이 어우러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느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고전의 자리에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무리
이말 저말 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채플린 영화중에서 딱 한가지만 고르라고 말한다면 난 모덤 타임즈보다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정말 채플린 영화중에서 이런 영화가 있구나?  싶을 정도로 놀라움을 주는 영화이다.  길게 길게 말을 늘어놓기 보다는 깔끔하게 단 한마디로 마무리를 지어보어보겠다.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위대함을 모르고 숨을 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히 희극적인 비극이라고 말이다.  꼭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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