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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1997),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가능한가? 본문

영 화/애니메이션

원령공주(1997),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가능한가?

유쾌한 인문학 2010. 6. 1.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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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개봉한 원령공주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정말 비슷한 작품이다.  세상이 멸망하고 난 후 천년이 흐른 뒤의 세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나우시카와 일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원령공주는 시대적적으로 대척점에 세운채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정말 다르게 내려진다.  그렇다면 원령공주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과거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왜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질문은 극중 아시타카의 여행이 가지는 질문과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  자연과 더불어 조용히 살아가던 마을에 산의 주인인 멧돼지가 괴물인 재앙신이 된채 오게 되고 그때 아시타카는 멧돼지를 막으려다 팔에 저주를 입게 된다.  결국 멧돼지를 죽인 후 그의 사체를 보니 몸에 총탄이 박혀 있었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그리고 산의 주인인 멧돼지의 몸속에 박힌 총탄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아시타카는 그렇게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아시타카의 여행은 결국 궁극적으로 왜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시타카가 서쪽으로 향하다 결국 마주치는 지점은 타타라 마을이다.  이곳은 광산을 채굴하고 무기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마을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총과 탄환이 멧돼지 신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을은 또 다른 자연의 수호신인 늑대일족과 원령공주와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아시타카는 그러한 상황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이다.



자연의 이중성과 동물신들 그리고 타타라 마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나오는 자연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자연과 자신을 파괴하려고 하는 인간에 대한 복수자로서의 자연이 그것이다.  원령공주 역시 마찬가지로 치유의 공간으로서 시시가미의 숲과 이와 대립되는 공간으로서 타타라 마을이 존재한다.  원령공주도 나우시카와 마찬가지로 자연은 물과 나무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은 타타라 마을의 불과 명백히 대립된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가장 위대한 자연신인 시시가미는 낮과 밤의 모습이 다르며 심지어 이름도 다르다.  또한 시시가미는 치유와 죽음 둘의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시시가미가 발을 내딛으면 생명이 싹트고 발을 떼면 싹튼 생명이 다시 죽어버리는 식이다.  결국 시시가미는 자연이 가지는 양면성을 잘 표현하게 된다.  시시가미와 관련하여 눈여겨볼 부분은 총탄에 맞은 아시타카를 치료하는 장면이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에 도착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지내다 우연히 원령공주와의 전투를 목격하게 된다.  극한 대립을 벌이는 양쪽 사이에 뛰어든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구하려다 총을 맞게 된다.  이에 원령공주는 아시타카를 시시가미의 숲으로 데려가 치료를 유도하게 된다.  시시가미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원령공주의 신뢰를 얻은 아시타카의 부상을 치료해주지만 아시타카의 저주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아시타카에게 내려진 저주의 핵심은 자연이 가진 인간에 대한 분노이기에 결국 시시가미와 자연은 인간 그 자체를 무한정 신뢰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극중 타타라 마을은 철을 생산하며 살아가는 마을로서 총도 만들어내는 상당히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마을이다.  타타라 마을의 촌장인 에보시의 목적은 간단하다.  좋은 무기를 생산하여 자신들의 마을을 지키는것이다.  이러한 에보시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더욱이 악역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문둥병 환자들을 보호하고 있으며 철을 생산하는 타타라 마을을 노리는 타인들에게서 마을을 지킬려고 할 뿐이다.  이유인 즉슨 타타라 마을을 노리는 권력자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는바 그들은 끊임없이 타타라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시도를 하게 된다.  만약 에보시가 마을을 지키는데 실패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다른 권력자에 의해 전부 죽임을 당하고 문둥병 환자들 역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타타라 마을의 입장에선 기술문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자행되는 자연 파괴는 다시금 자연의 수호자들과 대립을 하게 되는 이중 대립의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타타라 마을과 같이 확인해볼 부분은 타타라 마을 사람들 이외의 인간들이다.  권력자인 이들은 수단성을 강조하는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철과 무기가 탐나기에 타타라 마을 사람들을 전부다 죽여서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철과 무기만을 바라보는 인간들로서 그것을 위해서 타타라 마을 사람들을 죽인다는 수단을 정당화 한다.  결국 타타라 마을 사람들을 통해 인간문명에 대한 무거운 고뇌를 보여줌과 동시에 다른 인간 즉 권력자들을 통해 왜곡된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 중심적 사고관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게 된다.  과연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기술 문명을 완전하게 외면한채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한 것일까?  서두에서 데카르트적 주체관이 가져온 기술 숭배와 환경파괴적 양상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외면하였다는 비판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비판이 원령공주의 타타라 마을을 통해 극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자연과의 화해의 실패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시타카는 참 애매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명백히 자연의 편에 서지도 않고 타타라 마을 사람들의 편에 서지도 않는다.  전형적인 중간자적 입장이다.  아시타카는 그 어느 곳에도 서지 않기에 양자를 화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걸 지속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마치 나우시카와 같은 입장인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인데 왜 미야자키 하야오는 특이하게 원령공주에서 이런 역할을 젊은 남성에게 맡겼을까?  보통 남성성이라는 것은 폭력과 파괴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원령공주에서는 남자를 매개적 역할로 내세우게 되고 이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성격이라는 점이다.  즉 아시타카가 남성일지언정 파괴적 남성문화를 매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타타라 마을의 여성 지도자인 에보시를 통해서도 어느정도 확인이 되는데 기술 문명을 적극적으로 상징하는 타타라 마을의 지도자를 적극적 주체성을 드러내는 여성으로 설정하여 기술에 의존적이돼 결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남성문화는 대변하지 않는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측면과 더불어 아시타카의 역할에는 더 큰 중요성이 존재하는데 그건 바로 화해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극의 마지막에 다달으면 시시가미의 목이 잘리면서 시시가미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를 막기 위해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같이 협력하게 된다.  결국 시시가미의 폭주를 막아내고 모든걸 파괴하던 시시가미가 목을 되찾게 되자 그가 파괴한 모든 것에 생명의 씨앗을 뿌린채 사라져가게 된다.  그리고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로 돌아가고 원령공주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증오를 풀지 않은채 산으로 떠나버린다.  바로 이지점에서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는 극적인 차이점을 보이게 된다.  나우시카는 대지모 여신으로서 인간과 자연의 대 화해를 이루어내게 되지만 원령공주에서 화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시타카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금 가까워졌을뿐이며 아시타카가 없다면 그들은 여전히 적이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여전히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숲을 파괴할 것이고 그들의 철과 강력한 무기를 권력자들이 원할테니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술문명을 발전시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원령공주는 이들과 지속적으로 대립할 것이고 말이다.  다만 원령공주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풀지 않았으며 다만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로 떠나면서 가끔씩 산을 보러 오겠다고 말하면서 끝맺게 되는바 한 줄기의 소통의 가능성만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나우시카를 내놓은 이후 10여년의 세월동안 크게 변한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다 인간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성도 사실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 기술 문명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고 지금의 현실에서 기술 문명은 어느정도의 차연을 파괴할 수 밖에 없는 한계도 가지고 있게 된다.  이는 미야 자키 하야오가 타타라 마을 사람들를 통해 던지고 있는 무거운 질문과 동일하다.  결국 원령공주의 시점이 과거로 돌아간 이유에 대한 질문.  "왜 인간은 자연을 파괴할 수 밖에 없는가?"  과연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술문명과 자연의 공존은 가능한가? 그렇게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독하게 무거운 질문만 던진채 원령공주를 끝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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