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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
한가족이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오게 된다.  아버지와 두딸로서 큰아이는 사츠키, 작은아이는 메이라 부른다.  그들이 이사온 집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있는 집으로 아주 허름한 목조 건물이다.  이사를 와서 아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엄청난 수의 숯검댕이들이 모여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심지어 어린 여동생 메이는 조그만한 토토로가 도망가는 것도 목격한다.  즉 이 자매는 귀신도 신도 동물도 아닌 것을 보게되는 이상한 체험을 한 것이다.  도시에 살던 이 아이들이 시골로 와서 본 저것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왜 저것들을 보지 못하는 걸일까?  우리 곁엔 왜 토토로가 없는 것일까?



성과 속

성과 속은 명확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류 초기부터 생겨난 사고관이다.  이는  일종의 종교적 태도로서 구원이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이나 전염병 또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오는 다른 부족과의 충돌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극복이 가능하였다면 성속의 개념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고대인은 기본적으로 만물에 대한 완전성의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는 마치 창세기 당시의 낙원과 같은 완전성에 대한 인식으로 모든 자연적 재난 및 전염병과 사회적 충돌의 원인은 이러한 완전성에서의 분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성과 속의 구분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성속의 구분은 주로 민속 종교에서 확인이 되며 이미 세계 보편종교로 확립된 것에서는 이러한 점을 쉽사리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성과 속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1) 보편현상으로서의 성
성은 특정한 대상에 종속하여 나타나기도 하는 반면 일시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즉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특정한 공간이나 사물에 성의 지위가 부여되며 이때부터 그 공간이나 사물은 두려움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즉 성의 공간은 일정한 상대성을 가지게 된다.  예컨대 보통의 집은 평범한 속의 공간이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공간에 금줄이 쳐지면서 성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금줄이 성과 속을 나누는 경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은 민속종교를 숭배하는 구성원 모두에게 보편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컨대 한국의 문화에서는 고수레라는 것이 있었는데 고수레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난다고 믿는 민간 신앙의 일종이다.  이는 속신과 결합된 상대적인 성의 현상으로 이러한 현상은 같은 문화권 내에서도 지방에 따라서 조금식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확인할 수 있는 성에 대한 숭배는 자연 전반에 대한 숭배의 정신이 아닌 특정 대상에 현현한 성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운데 예를 들어 산에 놓인 바위에 성의 현현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 돌은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그 돌이 가지고 있는 사물로서의 특징이 사라지는건 아니다.  즉 정말로 그 바위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닌 바위에 설정된 성을 숭배하는 것이다.

(2) 성의 이원적 성격
성으로 설정된 공간이나 사물은 이원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한편으로는 민속종교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갈망과 희망을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한편으론 위험에 대한 경고 또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민속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성소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장소이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장소가 된다.  예컨대 불교의 사원이나 카톨릭의 성당과 같은 공간은 한편으론 은신의 공간으로 치유와 편안함 그리고 안전의 느낌을 던져주지만 다른 한편으론 두려움의 대상으로 행동가짐이나 마음가짐에 있어서 큰 주의를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성속의 영역은 아무리 현대기술문명이 발전하여도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남아 숨쉬고 있다.  예컨대 산부인과같은 공간을 들 수 있다.  산부인과는  과거와 같이 아이를 낳은 후 금줄을 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이가 있는 방은 성스러운 곳으로 설정된다.  그곳에선 그 어떤 불경한 행동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실례로 과거 신생아실에서 장난을 친 간호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성의 영역에서 감히 그런 장난을 했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3) 성의 질서와 속의 질서의 관계
성이라고 하는 것에는 만물을 관장하는 일련의 질서를 내포하게 된다.  세계 만물의 운행 법칙을 설명하고 그것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특정한 민속신에 대한 경외가 존재하는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전염병이나 태풍이나 가뭄따위의 자연 재해가 발생한 경우, 이 현상을 민속신이 관장하는 완전한 질서에 균열이 생긴 것으로 설명하게 되고, 그 주된 원인으로 그 사회 구성원이 보여준 불경으로 돌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이러한 성의 질서는 인간의 사회를 지배하는 속의 질서를 만듬에 있어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즉 사회 질서의 올바르지 못한 운용은 그 자체로서 성의 질서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성이 문란하거나 도덕성이 심각하게 무너진 사회의 경우 그 사회가 가지는 일련의 규범과 질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되며 이러한 일련의 타락상은 자연스럽게 성의 질서에 영향을 주어 자연재해나 전염병 또는 타 민족의 침략을 불러오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성의 신성시를 위한 일련의 금기의 설정을 가져오게 된다.  대표적으로 근친상간의 금지, 살인의 금지 따위를 들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종교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슬람의 라마단을 들 수 있다.  즉 적절히 금욕을 함으로 인해 성스러운 차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마단과 같은 금기를 통해 성스러운 차원을 받아들 일 수도 있지만 더 적극적으로 성을 영접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이 바로 엑스터시의 체험이다.  이는 민속종교를 넘어 보편종교에서도 확인이 되는 현상으로 엑스터시의 경험은 성과의 접촉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험은 스스로를 성으로 승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4) 성과 속의 변증법
성이란 불변하는 대상으로 설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성과 속은 서로간에 바뀔 수 있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즉 서로간에 변형되기도 하고 변증적으로 나아가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변증법은 운동과 변화라는 것을 핵심적 요소로 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적 운동성은 성속의 영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이 가지는 성스러움의 설정과 속이 가지는 더러움의 설정은 자연스럽게 속에서 성으로 나아가려는 변증적 움직임으로 화하게 된다.  즉 끊임없이 속에서 성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현상이 승화(昇華)이다.  즉 더 높은 차원의 현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적 성격은 성속이 가지는 상대적 성격과 결합하여 나타나게 된다.  앞서 보았듯 아기를 나은 집은 평소에는 속의 공간이지만 아기의 탄생이라는 일련의 사건과 더불어 성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다른 예로 죽음의 경우는 안좋은 의미로서의 속의 성격을 가지지만 일련의 장례 행위를 통해 성의 공간으로 설정이 되고 의례를 통해 그 죽음은 성으로서 정화가 된다.  


성속의 기원
성속의 어떤식으로 발전한 것인지 즉 기원에 대한 문제는 크게 세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첫째는 성과 속은 동시에 생겨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들 수 있다.  이 동굴은 접근이 매우 어려운 곳으로 일상적인 생활공간과는 매우 동떨어진 공간적 양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동굴에서 벗어나는 순간 속의 영역인 일상 생활 공간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렇듯 나란이 놓여진 두 공간은 성속이 가지는 동시성을 잘 보여주게 된다.  둘째는 속이 성으로 승화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즉 근친상간을 행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원초적 아버지 의 죽음은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 감정 즉 미워함과 동시에 사랑한다는 감정을 불러 오게 되고 이를 통해 숭배의 감정을 가져오게 된다.   이때 형성되는 것이 바로 근친상간 금지의 법과 같은 사회적 규범이다.  셋째는 만물은 모두 성이었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관점은 원시적인 형태의 일신교에서 확인이 되는바 유일신이 만든 세계와 만물은 원래부터 성의 단일성 아래에 놓인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속의 발생은 원래적 성에서부터의 변별로 이루어진 결과에 불과하다고 보게 된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근대 초기를 그려내는 작품으로 아직 완벽하게 현대화되지 않은 시골의 풍경을 그려낸다.  특히 일본 특유의 종교적 공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성과 속을 나누는 경계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중 특히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사츠키와 메이가 살고 있는 집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이다.  이 나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연의 상징으로서의 세계수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는 성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외 인간문명이 싹트는 마을은 속의 공간이 된다.  메이 가족이 이사오자말자 그 집에서 살아가던 숯검댕이와 새끼 토토로는 이사를 가게 되는데 바로 성과 속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숯검댕이와 새끼 토토로가 이사가는 이유가 도출된다.  즉 숯검댕이와 새끼 토토로는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성의 공간으로서의 집에 인간들이 들어왔기에 그 영역은 속의 영역이 변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성의 공간인 나무로 이주를 하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왜 토토로와 숯검댕이는 인간이 사는 속의 영역에서 같이 살지 못하고 이사를 가는 것일까?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숯검댕이와 토토로의 존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사츠키와 메이 두 자매뿐이다.  그 동네에 오래살던 할머니만이 그것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있을뿐 역시 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에게는 보이는 토토로가 어른들에게는 보이지 않을까?  간단한 이유로 그들이 보여지길 원치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니 새끼 토토로를 메이가 발견했을때 도망가는 것 아닐까?  이렇듯 이들이 이사를 가는 장면을 통해 그들이 인간을 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장면으로 메이가 제일 처음 새끼 토토로를 발견했을때 반투명인 것을 들 수 있다.  처음엔 반투명 상태로 이사를 가다 메이가 발견하자 도망치다 갑자기 투명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그걸 메이는 기어코 다시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럼 이사가던 새끼 토토로가 투명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메이의 눈에는 보였을까?  심지어 메이는 숲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토토로를 만나기까지 한다.  거기서 토토로 배위에 앉아서로 고함을 지르다가 토토로가 하는 말을 메이는 알아듣고 이 정체불명의 동물이 토토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 이런 능력은 갑자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메이가 보여주는 저런 능력은 사츠키와 토토로가 친구가 되는 장면을 통해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사츠키는 비오는 밤에 아버지에게 우산을 건네주기 위해 배웅을 나갔다가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서 비맞고 있는 토토로가 안스러웠는지 우산을 토토로에게 건네주고 되고 토토로는 그 우산을 쓰게 된다.  이렇게 둘은 친구가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에 대한 믿음이다.  현실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는 어른 인간들처럼 배타적이지 않으며 계산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문자그대로 이 자매는 아이들이다.  근대 이후 인간이 잃어버린 것중 하나는 바로 자연과 소통하고 성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미명아래에서 성에 대한 체험과 그 경외에 대한 태도는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에 자연스럽게 현대의 인간은 성과 거리를 두게 되고 이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이상 토토로를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극중 사츠키와 메이는 합리적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세계에서 잃어버린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토토로는 극중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결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극중 상황은 전형적인 어머니의 부재를 그려내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부모의 부재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모티브로서 본작에서는 어머니의 부재와 이사라고 하는 공간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즉 부모의 부재를 통하여 아이들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존재한다면 아이들은 저러한 특별한 경험을 할 이유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갈 것이지만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기에 아이들은 그 결핍을 매꾸기 위해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만나게 되는 것이 성의 직면이며 그 중심에 서는 것이 바로 토토로이다.  토토로가 가지고 있는 결핍 충족의 역할은 메이가 토토로를 최초로 만난 나무 속 공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가 부재하는 자신들의 집과는 다르게 토토로의 공간은 편안함과 안락함이 존재하는 마치 어머니의 뱃속과 같은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메이가 토토로와 가장 먼저 만나게 주된 이유 역시 어머니에 대한 갈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 이성과 토속자연신앙
사실 우리 곁에는 항상 토토로가 존재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질 못할뿐이다.  그럼 우리는 왜 토토로를 보지 못하는걸까?   합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현대의 사람들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합리적 이성의 발전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자연신앙 또는 토속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이러한 성에 대한 체험의 방법을 잃어버리면서 나타나게된 현상은 자연과의 소통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결국 토토로 역시 하야오의 근본적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야오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문제의식.  도구적이성의 사회지배로 인한 자연의 도구화 그리고 자연파괴.  이것을 막아낼 수 잇는 방법론으로서 자연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 매개체가 바로 사츠키와 메이 두 아이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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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ue paper

    | 2009.09.15 09:19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도구적 이성.. 심오한 애니...그래도 토토로는 넘 귀엽죠,ㅎ

  3. dark

    | 2009.09.15 10:45 | PERMALINK | EDIT | REPLY |

    전 저 감독껀 어쩌다보니 다 봤어요.
    티비에서도 자주 하는편이고(주말에 애니방송 채널에서 자주한다는..)
    그럴때 우연히 채널 돌리다가 보게되는데..
    봤던 것 또 보고 또 보고 한답니다.
    몇번보면 볼때마다 새로운게 보인달까요? 느끼는 점도 다양해지구요.
    요즘은 소재로 잘 쓰지 않는 자연에 대한(토속신앙등등..) 새로운 관점을 보게되죠.
    일본은 애니층이 두터워서 애니제작하는데 돈을 많이 들일수 있어설까요?
    캐릭터에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을 해줘서 좋더라구요.
    어떤 장면을 보면 주인공들이 둘이서 이야기중인데 바닥에서는 다른캐릭터들(모양이 딱히 정해져있진않음...먼지일수도있고 >>자연이라고 생각이되지만 정형적인 모양은 아님)서로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서로 빤히본다던가..장난친다던가...<<귀여움 ㅋㅋ
    다음에 다시 보시게되면 주변에 배경도 보세요~귀여운걸 많이보게됨 ㅋ

  4. 아홉살인생

    | 2009.09.19 23:25 | PERMALINK | EDIT | REPLY |

    역시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것이로군요. 저는 토토로 정말 재밌게 봤어요.
    토토로하고 센과치히로를 제일 재밌게 봤지요.

  5.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09.09.20 06:10 신고 | PERMALINK | EDIT |

    ㅎㅎㅎ 저도 센과 치히로는 젤 잼잇게 봣어요..

    센이랑 하울!!!

  6. Gabriel

    | 2010.05.31 16:27 | PERMALINK | EDIT | REPLY |

    일본의 전통적 자연관을 유럽의 사상에 너무 맞추신 느낌이 약간은 드네요.....

  7.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2 17:41 신고 | PERMALINK | EDIT |

    이건 뭐야.. ㅋㅋㅋ

    어느대목에서 웃으면 되는겁니까?

  8. 너돌양

    | 2010.06.02 11:22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일단 우리나라는 자연과 소통을 제대로 못하고있음 ㅋㅋㅋㅋㅋ

  9.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2 17:41 신고 | PERMALINK | EDIT |

    우린 쓰레기임..ㅋㅋㅋㅋㅋㅋ

  10. 미자라지

    | 2010.06.03 06:29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저는 예전에 댓글 달때도 못봤었고 지금까지도 못본거임...ㅋ
    참 좋아하는 감독이긴 한데...^^ㅋ

  11.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3 07:21 신고 | PERMALINK | EDIT |

    이걸 좀 보고 동심을 키우도록 해요..ㅋㅋㅋㅋㅋ

  12. 미자라지

    | 2010.06.03 07:26 신고 | PERMALINK | EDIT |

    동심따위 찾기엔 너무 늦어버렸음..ㅋㅋㅋ

  13. *저녁노을*

    | 2010.06.03 06:34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ㅎㅎ노을이두 못 본 건디...

    다양한 관심 가지게 만드네요. 감사히 보고 갑니다.

  14.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3 07:22 신고 | PERMALINK | EDIT |

    애들이랑 같이 보면 좋을꺼 같아요.

  15. 둔필승총

    | 2010.06.03 06:47 | PERMALINK | EDIT | REPLY |

    아, 이거 전에 본 것 같은데 다시 나온 건가요?^^;;;

  16.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3 07:22 신고 | PERMALINK | EDIT |

    작년에 봤던 토토로..

    죽지도 않고 또왔눼

  17. 빛날 휘

    | 2010.06.03 07:07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토토로 정말 재밌게 보았죠. ^^
    예전에 본 영화 중 인간이 신을 외면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순간
    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렸던... ^^;;

    좋은 글 잘보구 갑니다 ^^

  18.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3 07:22 신고 | PERMALINK | EDIT |

    오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네요.ㅎㅎㅎ

  19. 꼬기님

    | 2010.06.03 07:18 | PERMALINK | EDIT | REPLY |

    헐..먼 댓글이 이리 많아요?ㅋㅋ
    전 전날 글인줄 알고 오늘은 포스팅 안하셨나 하고
    돌아섰다가 다시 왔어요..
    용짱님 인기짱이네요 ㅋㅋ

  20. | 2010.06.03 07:18 | PERMALINK | EDIT |

    비밀댓글입니다

  21.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3 07:21 신고 | PERMALINK | EDIT |

    제가 작년만 해도 나름 잘나갔었따능..ㅋㅋㅋ

    지금은 뭐.. ㅋㅋㅋㅋㅋㅋ


    안습 듣보쟙..ㅠㅠ

  22. 머 걍

    | 2010.06.03 07:45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데카르트가 아주 몸쓸 짓을 한거군요.
    자연으로 돌아가야겠어요^^

  23. 안용태의 유쾌한 인문학

    | 2010.06.03 07:50 신고 | PERMALINK | EDIT |

    이뻐해주삼..ㅋㅋㅋㅋ

  24. ★입질의 추억★

    | 2010.06.03 08:29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전 아직도 토토로 음악이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25. 배리본즈

    | 2010.06.03 09:55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애니는 볼땐 재밌는데 재미로 봐서 그런지 나중에 까먹어 버린다는...T.T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26. 도꾸리

    | 2010.06.03 12:00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울 아이가 크면 나중에 함께 보고 싶은 애니 1순위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27. | 2010.06.03 15:00 | PERMALINK | EDIT | REPLY |

    비밀댓글입니다

  28. 눠한왕궤

    | 2010.06.03 17:28 | PERMALINK | EDIT | REPLY |

    @.@ (_ _) 부족한 홈피 구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는 영화보다 모르는 영화가 많지만...@.@ 많이 놀러오겠습니다. (_ _)

  29. killerich

    | 2010.06.03 17:56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아..토토로...ㅎㅎㅎ.. 참 재밌죠~..

  30. Totoro

    | 2010.06.04 00:15 | PERMALINK | EDIT | REPLY |

    고등학교때 그냥 보다가 나도 모를 눈물이 흘러내린 만화죠. 참고로 저는 남자인데 아직까지 피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으로 눈물이 나오는 만화가 두 편 있습니다. 당연히 70년대 초반 두 누님들과 꼬맹이때 봤던 플란더스의 개는 당시 어머니도 눈물을 흘렸던 최악의 최루성 만화였고 토토로는 아무도 없이 혼자외롭던 시기에 비디오를 보면서 단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지만 눈물을 느꼈던 걸작입니다

  31. 끝없는 수다

    | 2010.06.04 00:37 신고 | PERMALINK | EDIT | REPLY |

    핫~! 이것은 재탕? ㅋㅋㅋ 용짱님 옛날글이 확실히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ㅋ

  32. iskra

    | 2012.09.19 18:41 | PERMALINK | EDIT | REPLY |

    좋은글 잘 봤습니다. ^ㅡ^

    본문 글의 요지와는 크게 맞지 않지만~
    본문 중에 신생아 간호사를 예를 드셨는데,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조무사입니다. 수정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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