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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아일랜드(2009), 두가지 결말의 철학적 고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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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아일랜드(2009), 두가지 결말의 철학적 고찰

유쾌한 인문학 2010. 11. 1.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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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아일랜드(Shutter Island)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1번째 장편영화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2002년 갱스 오브 뉴욕에서 부터 스콜세지 영화에 4번째 출연하는 것이 되고 말이다.  이 작품 작년 개봉작인데 우리나라에는 조금 늦게 들어오게 된다.  뭐 이런 경우가 한두번도 아니고 말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전형적인 스릴러 영화이다.  스콜세지 감독의 입장에서 스릴러 영화에 도전하는건 처음이다.  케이프 피어를 스릴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려나?  모르겠다.  아무튼 스릴러 장르영화로 새롭게 도전한 이 작품은 많은 논란을 가져오는듯하다. 

일단 이 영화의 결말을 놓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도 치밀하게 계획된 사실에 포획된 수사관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테고 그냥 극이 말하는대로 정신병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어느쪽으로 바라보던 할말은 아주 많아지는 작품이다.  왜냐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공간적 특성때문이다.  고립된 섬과 그 섬에 있는 정신병원 그리고 그 정신병원 내부에서 또 다시 특별한 C병동 그리고 더 특별한 등대까지.  또 한가지를 더 짚어보자면 C병동이 가지고 있는 건축 구조적 측면까지. 

아무튼 각자가 원하는대로 보고 싶을테고 이걸 강요할수도 없으니 각자가 원하는걸 각각 따로 이야기 해보겠다.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다면 치밀한 계획에 포획된 수사관이라고 생각하는건 좀 어처구니가 없다고나 할까?  난 지나친 음모론 좋아하지 않는다.  뭐 어쨌건 두가지 결말에 해당하는 철학을 전부 제시해 드리겠다.




구조주의와 거대담론 - 거대 계획에 사로잡힌 수사관 디카프리오 결말
사실 영화를 보기전부터 포스터만 보고 구조주의가 기본적으로 깔린 영화겠거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였다.  구조란 무엇일까?  이를 논하기 위해선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내가 느끼는게 정말 느끼는 것일가??  나의 몸뚱아리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가??  어떤 악마가 나를 기만하는게 아닐까??  이런 의문에 의해서 데카르트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데카르트적 회의 또는 방법론적 회의라는 것이다.  세상 전체를 놓고 의심스러운건 다 쳐내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아무리 악마가 나를 기만하더라도 기만당하는 사유만큼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는 내가 생각에 속하는게 아니라 생각이 나에게 속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자기 투명성을 가지게 된다.  자기투명성이란 내가 내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채 그 어떤 것도 나의 사유와 인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코키토가 멋진게 바로 이부분이다.  완벽한 주체성.  모든 사람은 독립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는 주체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아래에 있고 나의 통제 아래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코키토가 인간을 중심에 세운건 좋았는데 이게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목적지향적이게 되고 효율성만을 추구하게 되고 그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게 된다.  인간 이외의 것은 전부다 도구화시켜버리는 도구적 이성이다.  즉 근대이성은 인간을 새롭게 등급화 시켰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심에 인간을 놓고 자신만을 보증하는 이런 식의 주체성은 주변의 것들에 대한 극히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를 원인으로 한 두개의 전쟁과 미친 이성의 광기를 목격한 인간은 저 현상을 분석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정말 돋보이는 획기적인 시도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구조주의이다.  구조주의는 하나의 관념적 체계라기 보단 방법론적 체계로서 코키토 에르고 숨을 철저하게 부정해버린다.

이는 언어학에서 시작된 하나의 학문적 방법론이다.  랑그언어학은 소쉬르라는 사람이 도입한 독특한 언어학이다.  소쉬르는 랑그와 파롤이라는 것을 구분하게 되는데 랑그는 체계를 뜻하고 파롤은 언어 사용을 뜻하는 개념어이다.  뭔말인가??  랑그는 개개인이 따라야하는 언어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고 파롤은 랑그가 개인에 따라 자유롭게 실현되는 현상 그 자체이다.  랑그는 사람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법칙 및 체계로서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며 사람은 혼자서는 절대로 이 체계를 바꿀수도 만들수도 없다.  다만 이 체계를 사용할 뿐이다. 

랑그는 기호들의 체계가 된다.  그럼 기호란??   언어학에서 기호는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고양이라는 글자를 보라.  저 글자 자체를 기표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저 고양이라는 기표를 보면 야옹 하는 동물을 떠올리게 되는바 기표에 담겨진 의미가 바로 기의이다.  그럼 기표와 기의의 연결에 무슨 필연성이 존재하는가??  고양이라는 기표에 반듯이 야옹하는 동물이라는 기의를 결합해야할 당위는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냥 이는 약속일뿐이다.  한마디로 기호는 체계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기호가 체계안에서 다른 기호들과 구분된다는 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론은 다양한 분야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된다.  

결국 인간은 언어속에 갇힐 수 밖에 없듯이 구조속에 갇힐 수 밖에 없고 그속에 있는 인간은 강제적으로 그 체계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주체는 사라진다.  인간은 체계속에 속해 있고 구조가 만들어내는 인식의 틀에 갇혀 사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결국 주체는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코키토적 자율적 존재라기 보다는 다양한 담론 구조들의 통과하는 통로이자 효과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 생각 당해지고 존재 당해진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영화로 돌아가보자면 영화는 거대한 섬에 따로 놓여있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본토를 이야기하지만 영화에선 본토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위의 스샷인 C병동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건 전형적 파놉티콘이라고 볼 수 있다.  파놉티콘은 오른편의 있는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제레미 벤담이 만든 일종의 감옥이다.  둥근형태의 구조물이며 중앙에 탑이 존재한다.  탑에서는 죄수들을 바라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그 탑에 감시자를 볼 수 없게 되어있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파놉티콘이 재미있는 것은 중앙의 탑에 감시자가 없더라도 죄수들은 그들을 볼 수 없기에 스스로 권력에 훈육되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파놉티콘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되는데 특히 구조주의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군대, 학교, 병원 등  이런 기관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이러한 제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교육하고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키는 곳인데 비슷한 방식으로 훈육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훈육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훈육의 특징은 어떠한 절대권력이 존재하여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 관계의 그물망속의 내부권력관계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점이다.  위계질서라는 특정한 감시시스템을 통해 행사되는 이러한 권력은 아주 기계적이면서 항구적이고 자신도 모르게 이 기계 시스템속에 우리 스스로가 속해있으면서 권력을 분유한채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놉티콘적인 특징을 영화는 크게 두가지로 제시하게 된다.  첫째는 C병동 그 자체이고 둘째는 섬과 그 섬에 놓여있는 등대라는 것을 통해서이다. 

결국 이러한 결론과 철학으로 영화를 바라본다면 영화의 결말은 정말 소름끼치게 다가오게 된다.  도대체 한명의 주체로서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철저하게 구조라는 권력관계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 된다.  즉 영화는 어떤식으로 한 인물을 권력관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측면을 정확히 짚어내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디카프리오가 수술하러 가고 난 이후 최후의 장면으로 등대를 보여주게 되는데 이것 또한 섬 전체가 가지는 거대한 파놉티콘으로서의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씬이다.  파놉티콘에 의해 훈육되고 길들여지며 만들어진채 담론의 회로속에서 사라져가는 주체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영화를 보신분들은 동굴씬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씬에서 나오는 그 대화들이 바로 이지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안의 환상과 공간적 측면 - 정신병자 디카프리오 결말
이제 두번째 결말로 한번 영화를 바라보자.  영화가 시작하자말자 나오는 위 스샷의 넥타이 씬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제대로 정신병 걸린 사람일려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였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디카프리오의 환상을 보여주게 된다.  환상속의 인물과 대화를 하고 그 환상에 의해 고통받기도 한다.  이러한 환상은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어떤 욕망이 극대화되어 자기 내부에서 자라난 또 다른 내가 된것으로, 이 영화에서 디카프리오의 환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현실 앞에서 그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 내면에 있는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욕망을 극대화시키면서 만들어낸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또다른 자신인 환상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욕망과 대화하게 된다.  당신이 가끔씩 행하는 상상속의 공상들도 당신의 욕망과의 대화인 것이다. 이러한 욕망들은 허용된 욕망과 허용되지 않은 욕망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 기준은 상징적 기표로서의 사회가 결정한다.  허용된 욕망은 그 발현이 허용되지만 허용되지 않은 욕망은 항상 억압된다.  하지만 억압되었다고 하여 그 욕망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그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게 되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러다 상징적 기표의 세상에서 나 자신이 흐릿해지고 나의 주체성이 부정되거나 하는 시점에 우리는 그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화가 폭발하게 되면 정신분열증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억압된 욕망과의 대화는 너무나도 달콤하기에 쉽게 무시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다.  아무래도 상징적 기표에서 나의 주체가 흐릿해질때 상상적 기표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대화는 내가 꿈꾸는 완벽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은 가끔 홀로 앉아 끝도 없는 망상의 세계로 빠져들곤 하는거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극중 디카프리오가 빠져들게된 저 환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디카프리오는 2차대전 참전 용사로서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를 앓은것으로 보인다.  시대자체가 50년대이니 저 스트레스에 대한 아무런 연구도 없는 상태이며 대부분의 참전 용사들은 방치되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스콜세지 감독은 앞선 택시 드라이버에서 한번 언급하게 된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부인과의 트러블이 생기고 부인마저도 우울증에 걸린 상태이다.  결국 부인은 자녀들을 전부 죽이게 되고 그것을 본 디카프리오는 부인을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환상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공간의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극중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나오는 말이 바로 본토라는 말이다.  이 본토라는 것은 단순하게는 미국 본토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진의는 상징적 기표로서의 사회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디카프리오가 배를 타고 바로 섬으로 직행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상징적 기표인 사회를 떠나 그가 무의식에 갇혀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즉 섬이라는 공간 자체가 디카프리오의 내면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섬에서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공간을 좁혀나간다.  처음엔 섬에만 들어왔던 그는 더 깊은 C병동으로 진출하게 되고 그 이후 더 깊은 등대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공간의 좁힘은 디카프리오가 보여주는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의 깊음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뭐 어려울거 하나 없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마무리
결국 첫번째 결말과 두번째 결말은 그 주제에 있어서 동일한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즉 거대계획에 사로잡힌 수사관으로서의 결말이 주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결말이라면 다른 결말인 정신병자라는 결말 역시 상상적 기표에 사로잡힌채 주체를 사라지게 만드니 말이다.  결국 따지고보면 이 영화의 결말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하는거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핵심은 사라진 주체 바로 거기에 존재하니깐 말이다.  여담으로 자아와 주체는 구분되는 개념이라는거 잊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뭐 이정도면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앞으로 스콜세지 감독이 스릴러 영화를 얼마나 더 내놓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당한 수작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한가지.  영화를 보면서 느낀건데 프로이트 타령이 은근히 되게 재수 없게 들렸다고나 할까?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는 정신분석 타령에 또 재수 없어 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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