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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터 문(1992), 욕망의 순수성과 파멸성 본문

영 화/90's 영화

비터 문(1992), 욕망의 순수성과 파멸성

유쾌한 인문학 2010. 9. 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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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터 문(Bitter Moon)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13번째 영화이다.  아마 연세가 어느정도 되시는 분들은 이 작품을 많이 알 것이라 생각되는데 어떨련지.  당시 홍보문구가 탐욕스러운 성 어쩌고 이런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아마 거기에 낚여서 보신분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영화를 보면 대단히 에로틱하긴 하지만 야하진 않다.  노출도 거의 없고 오직 분위기 하나만으로 모든 에로틱을 결정짓는다.  이 작품은 전 두작품인 대해적과 실종자의 실패에서 벗어나게 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그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건 흥행 여부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살아나느냐?  이게 핵심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비터문은 로만감독의 완벽한 부활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작품성을 보여준다.

사실 로만 감독의 영화는 미묘하게 어렵다는 생각이다.  단면적으로 드러나는것은 그다지 어려울것도 없고 되려 상당히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 실상을 살펴보면 딱히 손에 꽉 잡히는게 없고 이게 뭔가? 싶은 묘한 감정에 휩쌓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무래도 로만 감독의 성향에서 비롯되는 문제인데 한마디로 이 감독은 보통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면모가 많다는 점이다.  이유야 뭐 지속적으로 말해왔듯이 로만 감독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면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이해하기 힘든 영화감독이라고 칭해도 무방하리라.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이게 뭔지.  이런 영화를 도대체 왜 만든건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순간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은 상태이다.  물런 뭐 이런 경우에도 그냥 생각이 가는대로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결론이 도출되긴 하지만 아무튼 묘한 작품임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나이젤(Nigel: 휴 그랜트 분)과 휘요나(Fiona: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는 영국인 부부. 두사람은 지중해를 항해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여로에 오른다. 어느날 나이젤에게 휠체어에 탄 중년 남자가 접근한다. 그는 오스카(Oscar: 피터 코요테 분)라는 미국인 작가로, 빠리에 살면서 집필을 하고 있었다. 오스카도 아내인 미미(Mimi: 엠마뉴엘 세이너 분)와 여행을 하고 있었다. 오스카는 나이젤을 초대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실감이 넘치는 미미와의 사랑 이야기였다.

  오스카와 미미는 빠리의 시내버스에서 만났다. 사소한 사건으로 두사람은 사랑하게 되었다. 되풀이 되는 사랑의 나날. 둘의 사랑은 더욱 격렬해지면서 차츰 변모해 갔다. 듣고 있는 나이젤의 도덕성을 실험이라도 하려는 듯 전개되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혐오감을 느꼈지만, 차츰 그 이야기에 빠져든다. 나이젤은 정숙한 휘오나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원색적인 매력을 미미에게서 느낀 것이다. 권태감에 사로잡힌 오스카는 미미를 내쫓아버리고 만다. 독신으로 돌아가 평온을 찾는듯 했지만,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다. 휠체어에 앉은 오스카를 미미는 잔인하게 복수하기 시작한다. 두사람은 결혼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복수하는 수단으로 결혼이라는 멍에를 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사람은 나이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스카와 미미의 이야기가 끝나는가 했으나, 호화 여객선의 파티가 끝날무렵 전연 예기치 일이 생긴다.


욕망 그 본질에의 직시
일단 비터문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운데 허니문의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듯하다.  허니문과 비터문.  사랑의 시작과 끝.  이 양극단과 시작에서 끝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  이 작품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단 문제의 커플인 오스카와 미미를 보자면 이건 정말 막장의 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과 극을 오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분명히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하였고 그들은 젊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점차 그들은 익숙해져가고 지겨움을 느끼게 되어 성관계를 가학적이고 변태적으로 행하기 시작한다.  어느순간 그것에서도 흥미를 못느낀 오스카는 결국 미미를 버리게 된다.

사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기쁨, 슬픔, 분노, 쾌락, 희망 등등 모든 감정들은 반드시 외부 자극을 상정하게 된다.  자극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강도가 약해도 반응을 하게 되지만 그것에 익숙해지면 더 강한 강도를 원하기 마련이다.  오스카의 문제는 바로 이지점에서 발생한다.  처음에는 미미의 얼굴만 바라보아도 행복했지만 점차 그는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감정이라는 것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외부 자극이 필요한데 미미가 보여주는 자극에 익숙해지다보니 점차 무뎌지는 것이다.  이때 이 커플의 선택은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관계이다.  하지만 더 강해진 자극 역시 어느 순간이 되면 익숙해지고 결국 상대방에게서 그 어떤 성적 흥미도 느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때부터는 또 다른 새로운 자극을 원하게 되고 그 대상을 외부에서 찾게 된다. 

나이젤(휴 그랜트) 부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부부 역시 자극에 익숙해져 권태기 같은 것이 온 상태이다.  오스카와 차이점이 있다면 체면치레 하느라 적극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게 오스카가 접근하게 되고 오스카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며 나이젤에게 새로운 자극을 부여하게 된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오스카의 이야기에 점차 빠져드는 나이젤은 오스카의 이야기가 전달해주는 자극에 점차 반응하게 된다.  재미있는건 이러한 나이젤의 변화가 나이젤의 부인까지 자극하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별거 없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작은 자극이 연쇄적으로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자극에서 비롯되는 욕망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더 큰 자극을 향해 나아가려는 능동적 측면과 되려 현 시점에 머물려고 하는 수동적 측면이다.  오스카와 미미의 비극은 이 두극점이 타협없이 극단으로 나아갔기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둘만의 세상에선 살아갈 수 없는 것인데 미미는 머물기를 원했고 오스카는 더 큰 자극을 찾아 떠나길 원했다.  이는 아무래도 소설가인 오스카로서는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기에 그런 경향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미미의 입장에서는 불안한 자신의 삶을 안정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겠다.  이 두가지 반대되는 모멘텀의 조화가 중요한데 이커플은 철저하게 섹스에만 집착해버린 것이다.

나이젤 부부는 오스카 커플과는 반대로 둘다 욕망에 대하여 수동적인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가지 모멘텀은 정확히 양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겉으로는 수동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듯하지만 숨겨진 내면에는 능동적인 측면이 항상 꿈틀거리고 있기 마련이다.  이부부의 문제는 이 능동적 측면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 의외로 작은 자극에 쉽게 확 넘어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충격적 결말과 이어지게 된다.  젊잖아 보였던 나이젤 부인에게 저런 면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건 당신의 내면에도 존재하는 것이고 다만 양극단사이에서 추가 어느쪽으로 기우냐의 문제일뿐이다.

결국 욕망의 문제는 자극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가끔 어떤이는 욕망을 아주 더럽고 나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생각이다.  욕망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심지어 모든 욕망하는 것에서 벗어나겠다는 것 그거 역시 욕망이니 말이다.  문제는 그것의 방향성이다.  극중에서는 자극적인 섹스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자극을 변태적으로 이끌어나가 욕망 자체를 뒤틀리게 해버리지만 꼭 그런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서 로만 감독은 인도인을 한명 제시하게 된다.  그는 딸과 함께 인도로 돌아가는 중인데 나이젤 부부에게 자녀를 가지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즉 가족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극을 돌리고 욕망을 새롭게 창출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인도인이 던지는 대사중에 아주 인상깊은 것이 하나 있는데 흔히 서양인들은 인도하면 정신적인 것의 총체로서 생각하며 환상을 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대사이다.  바로 이 대사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즉 더럽고 추악한 벗어나야할 대상으로서 욕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되려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본질로서의 욕망을 바라보되 그것의 방향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마무리
정말 좋은 작품이다.  야하다는 둥 에로틱하다는 둥.  그런것에 함몰되어 예술이냐 외설이냐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는 현실이 안타까울뿐이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바라보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논쟁이 등장하는 것인데 솔직히 이런 논쟁 자체가 대단히 유치하다는 생각이다.  인간도 짐승인데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자기 방안에선 온갖 19금의 행위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작 영화 하나에 별에 별 잦대를 다들이대니 웃길수밖에.  그러니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욕망을 향해 드러내는 당신의 그 가식적인 태도를 비웃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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